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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_thoughts

[리뷰]심연에서 꿈틀거리는 미확인생명체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기승전결 등 치밀한 구조와 짜임새를 갖고 있다. 이야기가 이러한 짜임새를 잃는다면 두서없고 산만해질 것이다. 이외에도, 이야기가 흡입력을 갖기 위해 개연성을 필요로 한다. 허황된 이야기는 공감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삶을 소재로 만들어지기는 하나 짜임새에 따라 창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지만 삶 자체는 될 수 없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은 의도적으로 서사의 짜임새를 없앤 독특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어떠한 플롯이나 구조를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여기에도 사건이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사건과 무관하게 뜬금없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사건들은 서로 연관성이 없이 시간에 따라 나열돼 있다. 이러한 뜬금없음, 즉 어떠한 인과관계가 없이 나타나는 우연성이 바로 삶의 리얼리티인 셈이다. 이점이 바로 「강원도의 힘」이 지독하게 재미없으면서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승현 작가 역시 이러한 우연성에 주목한다. 그는 특별한 목적이 없이 하나의 시작점에서부터 자유롭게 연상되는 형상들을 그려나간다. 드로잉을 하는 주체는 작가이지만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다. 마치 그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형상들이 그의 손길을 통해 화면 위로 뛰쳐나오는 것과 같다. 때때로 예기치 못한 주변의 환경이나 화면의 조건(텍스추어나 재질 등)과 부딪히더라도 그의 형상들은 물이 흐르듯 새로운 모습으로 굽이친다. 




미지의 생명체와의 조우


그는 그의 작업을 미확인동물학이라고 부른다. 실제 미확인동물학은 과학자들을 주축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혹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살아 있는 존재를 탐사하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히말라야산맥에 살고 있다는 설인, 예티나 네스호의 괴물 등이 미확인동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파악한 생물종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생물의 십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미확인동물학이 시작된 것도 역시 우연이었다고 한다. 작가는 서울산업대학 조형예술과 학부과정을 마칠 무렵 자신만의 작품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알 수 없는 존재와 만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낙서를 하듯 그린 드로잉에서 생명체의 조짐을 발견했다.


우연성이 주는 유희


우연은 화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품을 만들고 전시공간에 설치하는 과정도 우연을 드러낸다. 그가 2007년 ‘갤러리킹’에서 가졌던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우연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로와 세로가 50cm 내외인 작은 화면에 각기 다른 유기체들이 그려져 있고, 그 유기체들이 서로 이어지는 연결체를 갖게 했다. 각각의 유기체는 연결체를 통해 결합함으로써 또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가 된다. 그렇다고 설치 순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무작위로 각각을 연결시키더라도 그때그때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될 수 있다. 우연한 선택과 조합을 통해 증식과 성장을 거듭하는 생명체인 셈이다. 



2008년에 있었던 개인전은 갤러리와 카페를 겸하고 있는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있었다. 작가는 전시기간 동안 이곳에 미확인동물을 그려나갔다. 방문객들은 이곳에 들릴 때마다 새로운 생명체들이 하나하나 늘어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작업의 과정은 미확인동물의 증식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역시 특별한 계획 없이 즉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벽면의 상태나 구조물의 조건에 따라 반응하며 그때그때 새로운 생명체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에 의한 작업방식은 그에게도 큰 유희였다고 한다. 작가 자신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심연에 드리운 낚싯대


'자연율'이라는 제목으로 연작을 하는 작가를 보며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는 화면에 여러 가지 사물을 붙여 울퉁불퉁한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상하좌우로 무심히 붓질을 한다. 자연율이라는 제목은 반복적인 붓질과 화면의 질감이 만들어낸 우연한 '자국'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하지만 캔버스에 여러 질감의 물체를 붙이며 붓질을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한다는 점에서 온전한 '자연율'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이 역시 조형물인 셈이다.


그러나 처음 작품을 구상하며 떠올렸던 발상은 어땠을까. 실제 모든 사람이 이 같은 경험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깨어 있는 동안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종잡을 수 없다. 물론, 그날그날 주어진 과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어지럽게 펼쳐지는 잡념을 걷어내고 집중하는 노고가 필요하다. 잡념이란 어떤 맥락이나 일관성을 갖지 않는다. 우연한 자극이 주어지면 잡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불꽃처럼 번진다. 의식이란 이렇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흩어져 온갖 잡념의 폭풍 속으로 쉽게 묻혀버린다. 이런 혼돈 속에서 견고한 구조를 길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사유인지 모르겠다. 


이승현 작가의 작품과 그 과정을 지켜보며 혼돈과 질서가 뫼비우스처럼 뒤엉켜 꿈틀대는 내면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혼란스럽게 발현하는 상이 가진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다. 그런 상들이 솟구치는 심연 역시 깊은 어둠에 잠겨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연성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위의 ‘자연율’과 이 작가의 작품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자가 우연을 포착하기 위해 무심한 동작을 반복한다면, 이 작가는 세밀한 화법으로 그것에 다가간다. 자연율이 일정한 조건 속에서 우연을 의도한 것이라면, 이 작가의 ‘미확인 생명체’는 깊은 심연에 드리운 낚싯대와 같다. 끌어올리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없다.


우연성은 견고한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연성은 질서의 임의성 또는 허위성을 폭로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혼돈으로 이끈다. 


※ 7년여 전에 작성한 리뷰를 수정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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