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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_ongoing/◎CIA와 미디어

CIA & Media: [3편] 세계가 알아야 할 50가지 팩트(11에서 20)


이번 편에서는 의미 있는 정황을 보여주는 여러 사실들이 눈에 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하며 미 정부의 한 기관인 CIA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 조직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원론적으로 이들의 정보 활동과 비밀 작전은 미국 정부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이 돈을 좇는 부패한 집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엇보다 이들의 비밀작전에 납치와 살인 등이 포함돼 있어 더욱 우려를 자아낸다. 미국 여류 화가 매리 핀초트 마이어의 의문 투성이 죽음에서도 CIA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케네디와 내연의 관계였던 마이어가 살해된 직후, 그녀의 일기는 CIA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이어가 우발적인 상황에서 범죄를 당한 것이라면 정보기관이 그 일기를 확보하기 위해 노심초사할 이유는 없다. 이런 점은 CIA가 그녀의 죽음에, 더 나아가 케네디 미 전 대통령의 암살에 연루돼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각주:1] 【옮긴 이】


열한 번째, CIA는 종종 편집권(editorial decision-making)에 개입한다. 예를 들어, CIA가 1954년에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Arbenz regime) 전복을 책동할 때,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각각 CIA 국장 및 국무장관이었던 알렌(Allen)[각주:2]과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각주:3]는 <뉴욕타임즈> 발행인인 아서 헤이즈 슐츠버거(Arthur Hays Sulzberger)에게 시드니 그루선(Sydney Gruson)[각주:4]을 과테말라에서 멕시코시티로 옮기도록 요구했다. 이에 슐츠버거는 멕시코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빌미로 그루선을 멕시코시티에 배치했다. 

(리사 피스(Lisa Pease)의  ‘미디어와 암살’(The Media and the Assassination), 302)[각주:5]

열두 번째, 1950년대 초부터 CIA는 비밀리에 정기간행물이나 신문 등을 발행하는 외국의 여러 언론사에 자금을 댔다고 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을 포괄하는 이들 언론사는 CIA의 공작에 부합하는 뛰어난 기사를 제공했다.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은 1977년에 쓴 기사에 “그런 출판사 중 하나가 <롬데일리어메리칸>(Rome Daily American)”이라고 적었다. CIA는 1970년대까지 이 언론사 지분의 40%를 보유했다. 

(Carl Bernstein, “The CIA and the Media,” Rolling Stone, October 20, 1977.)


열세 번째, 번스타인은 CIA가 급여를 받는 기자나 스트링어와 가졌던 관계와는 달리, “CIA에 종속적인” 뉴스 미디어 간부들과는 비공식적인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는 또, “<뉴욕타임즈>의 아서 헤이스 슐츠버거(Arthur Hays Sulzberger)[각주:8]와 그들의 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몇몇 간부들이 비밀 협정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같은 공식적인 양해는 드물었다. 번스타인은 “CIA 관계자와 언론사 간부의 관계는 대개 사회적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조지타운의 P 스트릿과 Q 스트릿 중심에서 만남을 가졌다”며 한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데보라 대비스는 CBS의 중역이었던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각주:9]와 CIA 국장 덜레스의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방송통신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안”으로 간주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대비스는 페일리가 “CIA 요원에게 취재 내용이나 뉴스 필름의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그들이 취재 기자의 브리핑을 받도록 허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1970년대까지 CIA와 주요 방송사들 사이에 협력 기준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Deborah Davis, 캐서린 대왕(Katherine the Great: Katharine Graham and the Washington Post), Second Edition, Bethesda MD: National Press Inc, 1987, 175)


열네 번째, 번스타인은 1977년에 쓴 자신의 기사에서 CIA 관계자가 “여러 신문들 가운데 <타임>지(誌)와의 관계는 단연 가치있는 것”이라 말했다면서 “1950년부터 1966년까지 약 10명의 CIA 직원이 <타임>지에서 취재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타임>지의 전 발행인이었던 슐츠버거가 승인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번스타인은 “취재 계획은 슐츠버거가 정한 일반적인 <타임>지 정책의 일부로, 가능하다면 언제든 CIA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슐츠버거는 CIA 국장 앨런 덜레스와는 가까운 친구였다. 번스타인은 자신 글 “CIA와 미디어”(The CIA and the Media)에서 토론회에 참석한 한 CIA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그런 수준의 만남은 가히 권력과 권력의 만남이라 할 만하다. 실제 우리는 상호협조하기로 하는 원칙적인 합의가 있었다.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은폐의 문제가 제기됐다. 실질적인 계획은 하급조직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윗선은 세세한 것까지 알길 원치 않았다. 그들은 그럴듯한 거부권(deniability)만을 원했다.”


열다섯 번째, CBS의 페일리는 CIA와 호혜적으로 활동하며 CIA가 네트워크 자원과 인력을 활용하도록 했다. 베테랑 방송 언론인이었던 대니얼 쇼르(Daniel Schorr)[각주:10]는 1977년에 “다수의 부자들이 사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CIA를 길들여 온 공공연한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그것은 (CIA에 대한) 지원의 한 형태였다”고 지적했다. 이에 덧붙여 쇼르는 “페일리와 CIA 사이에 신뢰와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쇼르는 또 CIA 요원들이 “CBS에 잠입한 정황을 보여주는 단서”를 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쇼르는 한 뉴스 에디터가 회상한 것을 인용하며 “이른 아침에 뉴욕에 있는 라디오 관제실에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들리곤 했던 CIA 관계자”가 있었다고 했다. 이 자는 <월드 뉴스 라운드업>(World News Roundup)[각주:11] 특파원들이 세계 전역에서 현장 상황을 녹음하거나 담당 편집자와 사건에 관해 논의하는 것에 귀 기울였다고 한다. 샘 자페(Sam Jaffe)[각주:12]와 관련한 이야기도 있다. 샘 자페가 1955년에 CBS에 입사지원을 했을 때였다. 한 CIA 관계자가 그에게 고용될 것이라 말했고, 이후 정말 그렇게 됐다. 그는 또, 샘 자페가 모스크바로 가게 될 것이라 말했고, 그것 역시 실현됐다. 그는 이때 U-2 조정사 프란시스 개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각주:13]의 재판을 취재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쇼르는 리차드 샐런트(Richard Salant)[각주:14]와 나누었던 대화도 언급했다. 1961년 리처드 살란트가 CBS 뉴스 부문 사장이 되었을 때, CIA의 한 사건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페일리와 CBS 사장 프랭크 스탠튼이 잘 알고 있는 ‘오랜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탠튼은 샐런트에게 그런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Schorr, Daniel. Clearing the Air, Boston: Houghton Mifflin, 1977, 277, 276.)


열여섯 번째, <내셔널 인콰이어러>(National Enquirer)[각주:15] 발행인 진 포프 주니어(Gene Pope Jr)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쓴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포프는 1950년대 초 CIA의 이탈리아 데스크에서 잠시 일했고, 이후 CIA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포프는 CIA의 유괴 및 살인 등을 자세히 다룬 내용을 발간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 내용은 수십 편에 달했고, 1년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포프에게 이는 전표나 차용증서를 모으는 것과 같다. 포프는 CIA의 숨겨진 이야기가 언제 필요할지 몰랐지만 발행부수가 2천만 부가 되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정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그 힘은 그를 보호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기대에 찬 말했다고 한다. 

(Paul David Pope, The Deeds of My Fathers: How My Grandfather and Father Built New York and Created the Tabloid World of Today, New York: Phillip Turner/Rowman & Littlefield, 2010, 309, 310.)


열일곱 번째, 1970년대 후반, <내셔널 인콰이어러>가 출판을 꺼려했던 폭발적인 화제 가운데 하나는 숱한 사람들이 한참 찾아 헤매던 매리 핀초트 마이어(Mary Pnchot Meyer)[각주:16]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에 중심을 두고 있다. 마이어는 케네디 대통령의 연인이었으나 케네디 암살 1년여 후 살해됐다. 


"그 기사를 쓴 기자들은 심지어 CIA 방첩작전의 수장이었던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James Jesus Angleton)을 현장에 배치할 수도 있었다."[각주:17]


수면에 떠오르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는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각주:18]와 CIA가 수년 동안 연결되어 있었고, CIA가 선거기부금과 CIA에 비판적인 소위원회에 소속된 27명의 미 하원의원과 상원의원과 함께 휴스에게 비밀 자금을 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들"에서 나왔다. 이뿐만 아니라, 위장을 위해 CIA가 명명하고 설립한 53개의 국제기업이 있었다. 게다가 CIA와 보조를 맞추며 주류 언론사에서 활동하는 기자 목록까지 있다.(Pope, The Deeds of My Fathers, 309.)


열여덟 번째, 25년 동안 CIA 방첩부를 총괄했던 앵글턴은 중견 언론-공작원을 완전히 분리해 전적으로 독립된 그룹을 운영했다. 이들은 민감하면서 위험이 상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앵글턴은 이 조직에 관한 파일 중 극히 모호한 부분만 남겼다.(Bernstein, “The CIA and the Media.”)


열아홉 번째, 1950년대에 CIA는 자신들의 요원이 기자로 활동하도록 교육하기 위한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공식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CIA 관계자는 그들이 순번에 따라 배치되었고, “너는 기자에게 가게 될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CIA가 선호했던 것은 이미 언론 산업계에 자리를 잡은 언론인을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Bernstein, “The CIA and the Media)


스무 번째, 익히 알려진 이름을 가진 신문 칼럼니스트나 방송언론인들은 CIA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번스타인은 “기자와 취재원의 통상적인 사이를 훌쩍 넘어선 CIA와의 관계를 가진 칼럼니스트나 방송 시사 해설가가 십수 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CIA는 이들을 ‘알려진 자산’(known assets)이라 일컬었고, 다양한 비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고,  이들은 다양한 사안에서 CIA가 가진 관점에 수용적이라고 간주됐다.(Bernstein, “The CIA and the Media.”)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Allen Welsh Dulles, John Foster Dulles, Arthur Hays Sulzberger, William Samuel Paley, Daniel Louis Schorr, Mary Eno Pinchot Meyer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Allen Welsh Dulles, John Foster Dulles, Arthur Hays Sulzberger, William, Mary Eno Pinchot Meyer, Daniel Louis Schorr, Samuel Paley (wikipedia)


  1.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정황도 있다. 이 블로그의 다른 글 "JFK 암살, 미 국방부와 CIA 연루 가능성"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s://kangcd.tistory.com/48?category=330602 [본문으로]
  2. 앨런 덜레스(Allen Welsh Dulles, 1893.4.7~1969.1.29)는 최초의 민간인 중앙정보부 국장(DCI)이자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국장이었다. 냉전 초기에 1953년 이란 쿠데타, 1954년 과테말라 구데타를 지휘했었고, 록히드 U-2 항공기 프로그램과 MK울트라 프로그램 등을 총괄했다. 피그만 침공 등의 실패로 인해 캐네디에 의해 해고됐다. [본문으로]
  3.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2.25~1959.3.24)는 미국 외교관이었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아이젠하워 정권에서 미 국무장관을 지냈다. [본문으로]
  4. 과테말라에서는 1944년부터 1954년에 걸쳐 급진적인 개혁이 추진됐다. 이전까지 과테말라는 스페인 식민지를 거쳐 오랜 수탈이 이루어졌고, 이를 방치하는 독재 부패 정권에 신음해야 했다. 1950년 10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아루벤스 정부는 미국 '유나이티드 푸르츠사(社)'(United Fruit Company)의 착취로부터 독립을 달성하려 했다. 이를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했고,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이 추진됐다. 이를 과테말라 혁명이라고 일컫는다. 이 기간 시드니 그루선(Sydney Gruson)이 과테말라 혁명에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는 그가 1954년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유나이트 푸르츠는 방대한 기업"(United Fruit Company is a Vast Enterprise)이라는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그루선은 국제정치 언론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언론인 플로라 루이스(Flora Lewis)의 남편이자 그 역시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한 언론인이다. 루이스와 달리 그루선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펜실베니아주립 대학도서관 사이트에서 찾은 "The Curious Case of Sydney Gruson and the Obsessions of Guatemala and the United States"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그루선의 당시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문서는 당시 미국은 반공주의에 심하게 집착했고, 과테말라에는 미국의 거대 자본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양측은 서로의 입장에 매몰돼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사태를 객관적이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언론인으로는 그루선이 유일했다고 평가했다. [본문으로]
  5. 리사 피스(Lisa Pease)의 ‘미디어와 암살’은 여러 인사가 공동집필한 책 『The Assassinations-Probe Magazine on JFK, MLK, RFK and Malcolm X』(2003)의 한 챕터로 실려 있다. [본문으로]
  6. 1945년부터 1958년까지, 스튜어트 알솝(Stewart Alsop)은 그의 형제 조세프 알솝(Joseph Alsop)와 함께 <뉴욕헤럴드트리뷴>(NewYork Herald Tribune)의 ‘팩트가 문제’(Matter of Fact)라는 칼럼 코너를 공동 집필했다. 이외에도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Saterday Enening Post)나 <뉴스위크>(Newsweek) 등에서도 활동했다. 미 의회계간지(Congressional Quarterly)의 로버트 메리(Robert W. Merry) 주간이 두 형제의 일대기를 집필해 『세계를 짋어지고』(TAKINGON THE WORLD-Joseph and Stewart Alsop:Guardians of the American Century, 1996)라는 책을 냈다. [본문으로]
  7. 필 그레이엄(Phil Graham)은 아내 캐서린 그레이엄(Katherine Graham)과 워싱톤포스트 컴퍼니의 공동 소유자다. 양극성 장애를 앓다 1963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본문으로]
  8. 아서 헤이스 슐츠버거(Arthur Hays Sulzberger, 1891.9.12~1968.12.11)는1935년부터 1961년까지 <뉴욕타임즈>의 발행인이었다. [본문으로]
  9. 윌리엄 사뮤엘 페일리(William Samuel Paley, 1901.9.28~1990.10.26)는 주로 미디어 분야에 관여한 미국의 사업가다. 작은 라디오 방송사를 미국 최고의 방송사 중 하나로 키워 CBS(the Columbia Broadcasting System)를 설립한 최고 책임자로 잘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10. 대니얼 루이스 쇼르(Daniel Louis Schorr, 1916.8.31~2010.7.20)는 60년 이상 세계 뉴스를 담당했던 미국 언론인이다. 그는 NPR(National Public Radio)에서 최근까지 최고로 평가 받는 수석 뉴스 분석가였다. 쇼르는 자신의 방송으로 세 번의 에미어워드를 수상했다. [본문으로]
  11. CBS 라디오에서 매주말 아침과 저녁에 방송하는 최장수 프로그램. 첫 방송은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 Österreichs)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유럽 상황을 전하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12. 샘 자페(Sam Jaffe ?~1985.2.9)는 모스크바와 홍콩, 베트남 등지에서 활동한 통신원 및 특파원이다. 소련 간첩 혐의로 말년을 불운하게 보내다 55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본문으로]
  13. 프랜시스 개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 1929.8.17~1977.8월.일)는 미국 CIA소속 록히드 U-2 첩보기 조종사다. 그는 1960년 5월 1일 소련 영공 정찰 임무 수행 중 소련군의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탈출에 성공해 목숨을 건졌지만, U-2기 사건으로 일컫는 이 사건으로 동서의 긴장 관계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wikipedia) [본문으로]
  14. 리차드 샐런트(Richard S. Salant, 1914.4.14 – 1993.2.16)는 1952년부터 CBS 임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부터 64년까지, 그리고 1966년부터 79년까지 뉴스 부문(News Division) 사장을 맡기도 했다. [본문으로]
  15. 1926년에 설립된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본문으로]
  16. 매리 핀초트 마이어(Mary Eno Pinchot Meyer, 1920.10.14~1964.10.12)는 워싱톤DC에서 활동하던 화가다. 그녀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 CIA의 관계자 코드 마이어(Cord Meyer)와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이혼 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염문에 연루됐다. 그리고 1964년 10월 12일 C&O 운하 인근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사건 현장은 친구이자 퍼스트레이디였던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 Onassis)와 함께 거닐던 곳이었다. 한 부랑아가 혐의를 받았지만 이렇다 할 증거는 없었다. 마이어의 사망 후, 그녀가 쓴 일기가 사회적인 관심사가 됐다. 마이어의 죽음을 두고 일각에서는 그녀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다. 따라서 세간의 관심은 그녀의 일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17. 문맥상 이 인용구는 마이어의 일기에서 발췌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케네디 암살 사건 등 광범위한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난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셔널인콰이어러>가 케네디와 마이어의 암살과 관련해 CIA가 연루됐을 만한 정황을 감추고 있다는 의혹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본문으로]
  18. 하워드 휴즈(Howard Robard Hughes Jr. 1905.12.24~1976.4.5)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력가 가운데 한 명이다. 알려지기로는 미국 재계의 거물, 투자자, 기록을 보유한 파일럿, 엔지니어, 영화 감독 등 다양하다. 그가 처음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영화 제작이다. 이후 항공 산업 등에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