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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_ongoing/◎CIA와 미디어

CIA & Media: [5편] 세계가 알아야 할 50가지 팩트(31에서 40)

국가의 정보기관이 자국의 여론조작에 관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기관(機關, organization)이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여전히 상식이다. 이는 신체의 개별 기관(器官, organ)이 통합적인 존재인 개체의 활동과 존속을 위해 작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런 기관들이 제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잘못된 신호를 만들어내 신체를 교란한다면 어떻게 될까?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이 밝혀졌다. 이 사건의 말단에는 두 사람의 요원이 있었다. 심리전단 안보사업 2팀의 A요원은 마흔네 개의 〈트위터〉 계정을 이용해 당시의 정부와 여당을 찬양했고, 야권 정치인을 비방했다. 이렇게 작성한 게시물만 2만 9,000여 건에 달했다. 안보사업 2팀과 3팀에서 파트장으로 근무하던 B요원도 있다. B는 조직 외부 인력을 동원해 〈트위터〉와 〈다음 아고라〉 등에 수천 건의 글을 작성했는가 하면, 외부 인력이 여론조작 지시를 잘 수행했는지 점검하며 활동비를 지급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행적은 발각됐고, 2017년 10월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2019년 3월 징역 10월과 징역 7월이 선고됐다.
이 사건의 조사에는 국정원 내부자의 정보 제공(2013년 3월)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 직원을 즉시 파면하고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반면 A는 6급에서 5급으로 승진했고, 논란이 일자 뒤늦게 취소됐다. 또한, 실형 확정에도 A와 B는 면직 처리됐다. 면직은 파면과 달리 연금과 퇴직금 보장에 훨씬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은 면직 후 양우회 산하의 리스회사에 간부급 직원으로 들어갔다. 양우회는 국정원 직원의 생활증진과 복지향상을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으로 알려져 있다. 양우회의 자산 규모는 불확실하다. 〈한겨레〉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양우회는 투자 등으로 자산을 운용하고 있고, 이 활동에 국정원 인력과 정보 등을 활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각주:1]
이 사건은 국가 기관이 자신 또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부여한 공권력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이처럼 부패한 조직에서 양심적인 구성원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반면, 본분을 버리고 부패에 협력하는 자들은 승승장구한다. 이런 양상이 사회 안에서 성공의 원칙으로 자리 잡는 순간, 그 사회가 아귀다툼의 지옥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옮긴 이】

서른한 번째, 음모론이라는 용어에 경멸적 의미가 더해진 것은 CIA의 ‘언론 자산’에 의해서다. 이는 워렌 보고서를 비판하는 입장에 관해 기술한 ‘문서 1035-960’에 의해 증명됐다. 이 ‘긴급 공보’ 문건은 지방검사 마크 레인(Mark Lane)[각주:2]의 《성급한 판결》이 베스트셀러 리스트 상위에 오르고, 지방검사 개리슨이 케네디 암살 수사에 박차를 가할 바로 그 무렵에 CIA가 발행해 전 세계로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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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공보(Dispatch)

1. 우리의 관심사.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날부터, 살해 배후에 대한 의혹이 있다. 이는 한동안 워렌 위원회 보고서(1964년 9월 말 발간)가 발단이 되었지만, 현재 다양한 작가들이 의혹 제기를 위해 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와 문서를 검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리고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비판하는 책과 기사가 새롭게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비판자들은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종종 위원회 자체가 연루됐다는 의심을 내비친다. 워렌 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아지자 최근 여론조사에서 미국 대중의 46%가 오스왈드 단독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위원회가 일부 의혹을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해 왔다고 응답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해외 여론조사 역시 양상이 유사하거나, 더욱 부정적인 결과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2. 이런 여론의 흐름은 우리 조직을 포함해 미국 정부에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워렌 위원회의 구성원은 그들의 덕망과 경험, 그리고 인지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발됐다. 이들은 양대 정당을 대표하며, 위원회의 스탭은 전국 각지에서 뽑혔다. 무엇보다 위원들의 지위 때문에, 이들의 도덕성과 명철함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미국 사회의 리더십 전체를 의심하게 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존슨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본 유일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 어떤 식으로든 현 대통령이 암살에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심각한 불신은 관련된 개인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 전체의 평판에도 영향을 준다. 여러 사실이 있지만, 우리 조직(CIA)이 위원회의 조사 과정에 정보를 제공하는 등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다. 리 하비 오스왈드가 우리(CIA)를 위해 일했다는 거짓 주장처럼 음모론은 종종 우리 조직에 의혹을 제기한다. 이번 긴급 문서의 목적은 음모론자의 주장에 대항해 그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다른 나라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배경 정보는 기밀 사항(classified section)을 비롯해 미분류(기밀이 아닌) 첨부 문건 등 여러 곳에 제공된다.

3. 액션(action). 아직 이런 논의가 없는 곳이라면, 우리는 암살의 의혹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지 않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논의가 활성화된 곳이라면 청자(addressees)는 다음이 요구된다. 

a. 교섭자나 엘리트 연결책 즉, 정치인이나 편집자 등과 주지(周知)의 문제를 논할 때 다음의 사항을 지적. 비판자들의 비난은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더 이상의 의혹 제기는 반대 측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다. 또한, 음모론 논쟁의 일부는 공산당 선전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근거 없고 무책임한 의혹 제기를 막기 위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촉구한다. 

b. (워렌 위원회 조사 결과에 대한) 비판자들의 공격을 논박하고 대응하기 위해 선전 자산(propaganda assets) 활용. 특히, 서평이나 피처 기사는 이 목적에 적합하다. 이 지침에 대한 미분류 첨부 문건은 (선전) 자산이 활용할 수 있게 유용한 배경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의 역할은 비판(또는 비판자)들에 관해 다음의 사항을 적절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i) 증거가 없는 시점에 채택된 이론과 결부된 비판, (ii) 정략적인 주장, (iii) 재정적 관심사(즉 돈벌이 수단이라는 의미), (iv) 성급하고 부정확한 연구 혹은, (v) 자신들의 논리에 빠진 주장 등.  
비판의 전반적인 현상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유용한 전략은 플레처 네벨(Fletcher Knebel) 기사와 관찰자(Spectator)의 한 예를 배경에 두고 공격에 관한 ‘엡슈타인의 이론’(Epstein's theory)을 채택하는 것이다. (마크 레인Mark Lane의 책은 엡스타인의 책보다 훨씬 설득력이 떨어지고, 박식한 비판가와 경합할 경우 결과가 좋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관련 없는 세부사항에 빠져서 대응이 훨씬 더 어렵다.)

4. 어느 특정한 작가가 지정되지 않은 공개 혹은 비공개 미디어 토론이나 아직 출간되지 않은 공격적인 출판물에서 다음의 논쟁은 유용할 것이다. 

a. 중대한 증거 가운데 새로운 것은 (워렌)위원회가 고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은 종종 드레퓌스(Dreyfus) 사건에 비견된다(예를 들변 요아킴 조슨Joachim Joesten과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있다). 그러나 이들 사례와는 달리, 워렌 위원회에 대한 공격은 새로운 증거나 납득할 만한 혐의자를 내놓지 못했으며, 비판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된 게 없다. (비록 불완전한 것이지만, 1933년에 발생한 라이히슈타크(Reichstag) 화재가 좀 더 유사할 수 있다. 이는 역량 있는 역사학자들(프리츠 토비아스Fritz Tobias, A.J.P 테일러Taylor, D.C. 와트Watt 등)이 현재 신뢰하는 것으로, 판 데르 루베(Van der Lubbe)가 나치나 공산주의자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신에 따라 저지른 사건이다. 나치는 공산주의자의 책임으로 돌리려 했지만,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향해 펼친 나치 책임론이 성공적이었다.)

b. (워렌 위원회에 대한) 비판자들은 보통 특정 항목을 과대평가하고 다른 항목을 무시한다. 그들은 개개인들의 목격에 대한 회상을 더욱 강조하고 탄도, 부검, 사진 증거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인 목격은 신뢰성이 낮고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고로 비판자들이 다루기 쉽다. 위원회의 기록을 면밀하게 조사하면 대개 상충하는 목격담이 문맥을 무시하거나 위원회가 충분한 이유가 있어 이를 기각했음을 알 수 있다. 

c. 종종 제기되는 거대한 규모의 음모를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정보제공자는 막대한 로열티 등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법무장관이자 존 F. 케네디의 형제였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야 말로 어떠한 음모도 감추거나 간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한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제럴드 R. 포드(Gerald R. Ford) 하원의원은 민주당 행정부에 이익이 된다면 잠자코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러셀 상원의원은 워렌 대법원장 측의 악행을 폭로하기 위해 모든 정치적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게다가 (음모의) 공모자는 의전 차량의 경로와 속도, 움직이는 타깃, 암살자가 발각될 수도 있는 위험성 등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조건으로 인해 저격 장소를 선정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유한 공모자 집단이 훨씬 더 안전한 조건을 마련했을 수도 있다.

d. 비판자들은 종종 지적 자부심과 같은 것에 현혹되곤 한다. 그들은 어떤 이론을 우연히 접하고 그것에 빠져든다. 그들은 또 위원회가 모든 질문에 어떤 식으로든 항상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비웃는다. 사실, 위원회와 위원회 스태프의 구성은 어떠한 하나의 이론에 매몰되거나 필연성을 도출하기 위해 개연성이 편법적으로 변형되는 것을 막기 위한 훌륭한 보호수단이다. 


서른두 번째, 〈타임지〉는 CIA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발행인이었던 헨리 루스(Henry Luce)와 아이젠하워의 CIA 국장이었던 앨런 덜레스(Allen Dulles)의 친분에서 비롯됐다. 1966년 전직 보도기자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가 중앙정보국장(DCI: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기자들이 CIA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독려하면서 “언론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타임 워싱턴〉의 선임기자 휴 시드니(Hugh Sidney)는 이렇게 회상했다. 
“〈타임 워싱턴〉이 CIA에 관해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존 맥콘(John McCone), 리차드 헬름스와 함께 우리는 그 일에 착수했고, 우리가 CIA에 찾아가 그 사안을 내밀었다. …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착오 없이 우리를 안내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71년 가을 〈뉴스위크〉가 리차드 헬름스와 ‘새로운 첩보 활동’에 관한 커버스토리를 진행하기로 했을 때, 〈뉴스위크〉 직원에 따르면, 잡지사는 충분한 정보를 얻기 위해 CIA를 바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기사는 … 일반적으로 헬름스가 촉진하려 애쓰던 일련의 취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 … CIA 내부의 관심이나 위신과 관련해 주된 관점이 은밀한 공작에서 정보 분석으로 전환됐고, 채용의 대부분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정보 관리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Victor Marchetti and John D. Marks, The CIA and the Cult of Intelligence, New York: Alfred A. Knopf, 1974, 362-363.)

서른세 번째, 1970년 짐 개리슨은 반자전기인 《차가운 유산》(A Heritage of Stone)을 출간했다. 개리슨의 전기 작가이자 템플(Temple)대학 인문학 교수인 존 멜렌(Joan Mellen)은 개리슨이 이 책에 담은 내용에 주목했다. 책에는 뉴올리언스 지방검찰이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이루어진 CIA 활동을 어떻게 알았는지, 오스왈드와 잭 루비가 CIA와 함께했는지 여부를 묻는 워렌 위원회의 질문에 CIA가 어떻게 6개월이나 끌 수 있었는지 등의 경위가 담겼다.
멜렌의 설명에 따르면, CIA는 《차가운 유산》에 대응해 미디어 자산을 결집했다. 그러자 뉴욕 타임즈,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선 타임즈, 라이프 잡지에서 이 책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존 레너드(John Leonard)의 〈뉴욕타임스 서평〉[각주:3]은 변형을 거듭했다. 레너드 서평의 원고 마지막 문단은 워렌 보고서에 의혹을 내비쳤다. 레너드는 “전반적으로 뭔가 악취가 난다”라며 이렇게 썼다. 
“왜, 베데스다[각주:4]는 케네디 경부의 장기에서 프론탈샷(frontal shot)[각주:5]의 증거를 조사하지 않았는가? 법적으로 필요한 텍사스 검시 이전에 케네디의 시신을 워싱턴으로 갑작스럽게 이송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이 단락은 〈타임지〉의 새로운 판(版)에서 사라졌다. 열의 3분의 1이 날아가고, 서평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솔직히 나는 워런 위원회가 부정직하기보다는 형편없는 짓을 했다고 믿고 싶다. 나는 개리슨이 무능을 설명하기 위해 괴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각주:6]
(Joan Mellen, A Farewell to Justice: Jim Garrison, JFK’s Assassination, and the Case That Should Have Changed History, Washington DC: Potomac Books, 2005, 323, 324.)

서른네 번째, 코드 마이어(Cord Meyer Jr.)[각주:7] CIA 부국장은 알프레드 매코이(Alfred McCoy)[각주:8]의 《동남아시아에서의 헤로인의 정치》(The Politics of Heroin in Southeast Asia)가 출판을 검토하고 있을 무렵, 출판사 ‘하퍼앤로우’(Harper & Row)의 명예회장인 캐스 캔필드(Cass Canfield Sr.)에게 이와 관련해 어필했다. 이 책은 현장 연구와 예일대 박사 논문을 바탕에 두고, 저자가 아편 교역에서 CIA의 혁혁한 역할을 조사한 바를 담고 있다. 매코이는 이렇게 회상했다. 
“CIA 관계자는 내 책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며 하퍼앤로우를 만류했다. 명예스럽게도 캔필드 씨는 이를 거절했지만, 출간에 앞서 원고를 검토하는 것에 합의했다.”
(Alfred W. McCoy, The Politics of Heroin: CIA Complicity in the Global Drug Trade, Chicago Review Press, 2003, xx.)

서른다섯 번째, 《비밀 조직》(The Secret Team)의 출판은 1972년에 광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검열에 직면했다. 이 책은 미 공군 대령이자 펜타곤과 CIA의 연락관인 플레처 프라우티(L. Fletcher Prouty)[각주:9]가 쓴 책이다. 책에는 CIA의 ‘흑색작전’[각주:10]과 첩보 활동에 대해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담을 열거하고 있다. 프라우티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사장시키기 위한 캠페인은 전국적이고 세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쏟아진 우편물이 말해주듯이, 이 책은 도서관과 의회 대학 등에서 사라졌다. 나는 CIA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프렌티스홀(Prentice Hall)과 같은 주류 출판사나 발랜틴북스(Ballantine Books)와 같은 페이퍼백[각주:11]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작가였다.”
(L. Fletcher Prouty, The Secret Team: The CIA and Its Allies in Control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New York: SkyHorse Publishing, 2008, xii, xv.)

서른여섯 번째, 1975년 파이크 위원회 청문회에서 오티스 파이크(Otis Pike) 하원의원은 윌리엄 콜비(William Colby)[각주:12] 중앙정보국장에게 CIA에 고용된 사람 중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코비는 “제 생각에 이는 일종의 세부사항으로, 상원의 집행부 회기(executive session)[각주:13]에서 다루고 싶은 것입니다, 의장님.”이라고 답변했다. 일단 원(院) 내가 비자 콜비는 CIA가 11명의 요원을 위해 ‘미디어 커버’를 사용했다고 시인했지만, 이는 비밀 첩보(the clock-and-pencil)[각주:14] 작전이 한창일 때보다 훨씬 적은 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신문하더라도 최고 상층부에 협조한 출판사나 네트워크 책임자에 관해 말하도록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Schorr, Clearing the Air, 275.)

서른일곱 번째, 전 CIA 정보관인 윌리엄 배더(William Bade)는 미 상원 정보위원회가  미국 언론매체에 CIA 잠입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배더는 “연결의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고 말했고, “경영 단계에 CAI 측 사람들이 있다”면서 “예를 들어, 《타임지》를 굳이 조작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Bernstein, The CIA and the Media)

서른여덟 번째, 1985년, 영화사학자이자 교수인 조셉 맥브라이드(Joseph McBride)는 1963년 11월 29일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각주:15]로부터 받은 비망록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메모의 제목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다. 메모에는 FBI 요원이 두 사람에게  브리핑을 제공했다는 FBI 국장의 진술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CIA의 조지 부시(George Bush)였다. 맥브라이드가 CIA에 그 메모에 대해 묻자 홍보 담당관은 짧게 “확인도 부정도 할 수 없다”라며 형식적이고 모호한 답변만 했다. 언론인 루스 베이커(Russ Baker)는 “CIA가 출처와 방법을 다룰 때 제공하는 전형적인 답변”이라고 지적했다. 
맥브라이드가 “거기 없었던 사람, C.I.A. 첩보원 조지 부시”(The Man Who Wasn’t There, ‘George Bush,’ C.I.A. Operative)라는 제목의 글을 〈네이션〉(the Nation)[각주:16]에 기고하자 CIA는 성명을 냈다. 성명은 조지 부시가 FBI의 기록에 언급된 점을 꼬집어 “조지 윌리엄 부시가 CIA 본부에서 형식적인 야간 근무를 채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보고를 받기에 적절한 장소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 사건 이후, 연구원들은 1953년만큼이나 이른 시기에 조지 H. W. 부시와 CIA를 연결하는 문서들을 발견했다.

서른아홉 번째, ‘글라디오 작전’(Operation Gladio)은 주요 주류 언론매체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됐다. CIA를 포함한 서구권 첩보요원과 합동 테러리스트가 연루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각주:17] 간의 협업이었던 이 작전은 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유럽 전역에 걸쳐 민간을 목표로 총격과 폭파 활동을 했다.
2012년 영문 뉴스 매체를 대상으로 글라디오 작전에 관해 ‘렉시스넥시스 아카데믹’(A LexisNexis Academic) 검색을 실시해 31개의 기사를 찾았다. 대부분이 영국 신문에 실린 것이었고, 단 4개의 기사만 미국 출판물에 실렸다. 이 가운데 3개가 〈뉴욕타임스〉였고 단신 1개가 〈탬파베이 타임스〉(Tampa Bay Times)에 실렸다. 2009년 BBC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고, 어떠한 네트워크나 케이블 뉴스 방송도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 작전을 언급한 적이 없다. 글라디오를 언급한 거의 모든 기사는 이탈리아의 줄리아 안드레오티(Giulio Andreotti) 총리가 작전 과정에 이탈리아가 참여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1990년에 몰려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A16면에 묻혀 있는 기사에서 글라디오가 이탈리아의 창작물이라고 잘못 지칭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일부 미국의 개입에는 비중을 두지 않았다. 실제, 전 CIA 국장 윌리엄 콜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은밀한 준군사조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구축된 중대한 기관이라며 “워싱턴과 NATO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꾸려진 최소한의 그룹”을 포함한다고 밝혔다. 
(James F. Tracy, “False Flag Terror and Conspiracies of Silence,” Global Research, August 10, 2012.)

마흔 번째, 1995년 4월 19일 오클라호마시티에 있는 ‘앨프리드 P. 뮤러’(Alfred P. Murrah) 연방정부청사폭탄 테러[각주:18]가 있기 며칠 전, 중앙정보국장 윌리엄 콜비는 네브라스카 주 상원의원인 자신의 친구 존 디캠프(John DeCamp)[각주:19]에게 미국 내 민병대와 패트리어트 운동[각주:20]에 대한 자신의 우려를 털어놓다. 그러자 책과 정기간행물, 카세트테이프, 라디오 방송 등과 같은 당시의 대안적 미디어의 사용으로 인해 인기가 급상승했다. 콜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전운동으로 이 나라의 베트남전 수행과 승리가 불가능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네.”
“소중한 친구, 내 말을 듣게나. 자네는 변호사로서 핵심적인 사람이 되겠지만, 민병대와 패트리엇 운동이 총명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반전운동보다 훨씬 중대하고 또 훨씬 위험하다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일세.”[각주:21]
(David Hoffman, The Oklahoma City Bombing and the Politics of Terror, Venice CA: Feral House, 1998, 367.)

 

  1.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한 내용은 연합뉴스2020113일자 “'모욕 댓글' 국정원 요원들, 계열사 간부 재취업 논란”(한지훈 기자)을 참고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201103043300001

    [본문으로]

  2. 마크레인(Mark Lane, 1927년 2월 24일~2016년 3월 10일)은 미국의 법률가이자 뉴욕주 의원, 민권 운동가, 베트남 전쟁범죄 조사관이다. 또한, 그는 케네디 미 대통령 암살과 관련해 선도적인 연구가이자 저자, 음모론자 등으로 분류된다. (wikipedia) [본문으로]
  3. 〈뉴욕타임스 서평〉(New York Times Book Review)는 주간지 〈뉴욕타임스〉에 논픽션과 픽션을 아우르는 서평을 담은 섹션으로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 레너드는 이 섹션의 고정 필자였다. [본문으로]
  4.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에 있는 베데스다 해군 병원(Bethesda Naval Hospital) [본문으로]
  5. 프론탈샷(frontal shot)은 대상과 마주쳤을 때 총이나 활로 정면을 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6. 이 서평은 현재도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https://www.nytimes.com/1970/12/01/archives/books-of-the-times-the-shawgarrison-affair.html [본문으로]

  7. 코드 마이어(Cord Meyer Jr. 1920년 11월 10일~2001년 3월 13일)는 1951년 앨론 덜레스의 소개로 CIA의 전신인 OSS에 들어가 프랭크 위즈너 밑에서 정보 활동 이력을 쌓았다. [본문으로]
  8.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W. McCoy, 1945년 6월 8일~)는 미국의 역사학자다. 특히 맥코이는 필리핀 역사와 미국의 외교정책, 유럽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지배, 불법적인 마약 밀매, CIA의 비밀 작전 등에 정통한 학자로 평가된다. [본문으로]
  9. 플레처 프라우티(Leroy Fletcher Prouty, 1917년 1월 12일~2001년 6월 5일)는 존 F. 대통령 시절, 합동참모본부 특수작전국장을 지냈다. 미 공군에서 대령까지 지낸 그는 제대 후 은행 임원으로 들어갔다. 이후 CIA의 비밀 작전 등 미국의 외교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본문으로]
  10. 색작전(black operation; black ops)은 정부, 정부기관, 군조직 등에서 행하는 비밀작전의 일종이다. 흑색작전 참가자는 신원이 기밀에 부쳐지며, 흑색작전을 수행한 조직은 자신들이 그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wikipedia) [본문으로]
  11. 책은 제본 방식에 따라 페이퍼백(paperback or softcover)과 양장본(hardcover or hardback)으로 나뉜다. 페이퍼백이 보급판이라면 양장본은 소장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보급판 책은 주로 ‘문고판’이라고 일컫는다. [본문으로]
  12. 윌리엄 콜비(William Egan Colby, 1920년 1월 4일 ~ 1996년 4월 27일)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중앙정보국장이었다. [본문으로]
  13. ‘executive session’은 미국 상원 간부들이 갖는 일일 회의를 말하며 비공개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주로 임명이나 협약을 비롯해 대통령이 제시한 사안 등 주요 현안을 논한다. 이 글에서 윌리엄 콜비는 사실상 하원에서 논할 주제가 아니라며 답변을 회피한 셈이다. [본문으로]
  14. 영어에서 첩보활동과 같은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망토와 단검’(cloak-and-dagger)이라고 표현한다. the clock-and-pencil operations은 단검을 ‘연필’로 바꿔 붙인 작전명이다. 즉, 무력이 아닌 문필을 활용한 첩보 작전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으로]
  15.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 1895년 1월 1일~1972년 3월 2일)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초대 국장을 역임한 미국의 사법행정관이다. 그는 1924년 FBI의 전신인 수사국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FBI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2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37년 동안 국장을 맡았다. [본문으로]
  16. 〈네이션〉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주간지로, 전보적인 정치나 문화를 소재로, 오피니언, 분석 등을 제공한다. [본문으로]
  17.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는 국제 군사 동맹이다.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 조약에 의해 창설됐다. 이 기구는 회원국이 어떤 비가입국의 공격에 대응하여 상호 방어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집단 방어 체계로 운영된다. 북대서양 조약 5조는 무장 공격을 당한 회원국에 대해 회원국이 어떤 지원도 할 수 있다라고 돼 있다. 이 조항은 9·11 테러 이후 처음이자 유일하게 이루어졌다. 2020년 기준 회원국은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 미국, 그리스, 터키, 독일, 스페인, 체코,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등 30개국이다. [본문으로]
  18.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Oklahoma City bombing)로 더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19. 존 디캠프(John W. DeCamp, 1941년 7월 6일~2017년 7월 27일)는 1971년부터 1987년까지 네브래스카 주 의회에서 활동한 공화당 정치인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 육군에서 보병으로 복무했다. 1975년 그는 ‘영아 수송 작전’(Operation Baby Lift)을 개시해 2,800명의 베트남 전쟁고아를 대피시켰다. 한편, 당시 베트남 주재 대사였던 윌리엄 콜비 전 CIA 국장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20. 미국에서 벌어진 패트리어트 운동(Patriot Movement)은 비조직적인 성격의 보수주의, 네셔널리즘 정치운동, 무장 민병대, 시민 주권, 조세저항 등과 같은 일련의 사회 현상을 일컫는다. 이들은 종종 반정부 음모론을 비롯해 반유대 이념에 주목하기도 했다.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폭탄테러가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와 테리 니콜스(Terry Nichols)라는 패트리어트 운동가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1. 문맥상 중앙정보국장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