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교수(서울대 산업디자인)
나는 김민수 교수에게 "곧은 소리가 핍박 받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서울대를 상대로 7년 간이나 지속했던 복직투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미소로 화답하는 그의 표정에는 그런 어려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 사건은 세상을 하나 둘 알아가던 젊은 미술인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는 1998년 재임용 심사과정에서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실적물의 4배인 8편의 논문을 낼 만큼 열정적인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적 미달'이라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었다. 이것은 서울대 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재임용에 탈락한 진짜 이유는 1996년 10월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가 주최한 '한국현대미술교육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46-1960' 이라는 개교 50주년기념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 교육 50년사:1946-1960"이라는 논문이 문제였다. (참조: 오마이뉴스 '재임용 탈락, 힘겨운 복직투쟁 벌이는 서울대 김민수 교수' http://tln.kr/2568)
이 연구에서 그는 미대 교수들의 친일행적을 언급했었고, 이것이 밉보여 재임용 탈락이라는 어이 없는 집단 이지메로 이어졌던 것이다. 당시, 인하대 미술교육과에 재직 중이던 성완경 교수는 '서울 미대 품성론'이라는 글을 통해 동료 교수들의 침묵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었다. 성 교수는 "사회 통념에 비추어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종가집 모범생들의 몸에 밴 기율이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한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곧은 소리'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본질을 잃고 허황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디자인계에 대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모두가 디자인을 지식경제 시대를 이끌어갈 고부가가치 산업 즉, 돈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던 시절, 김민수 교수는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1997년, 솔 출판사)’라는 디자인 비평서를 통해 디자인이 삶의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삶을 생성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그는 현재에 대해서도 "디자인이 삶과 행동을 조직하는 능력에 대해 홍보하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디자인이심각하게 오남용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삶에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UX: User eXperience 에 대해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지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디자인에 있어서 사용자 경험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김 교수는 "어떤 의미에서 트렌드에 종속된 ‘말 만들기 차원의 유행어’처럼 인식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며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나는 사용자 경험이란 말이 새로운 개념이라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물리적이고 비물리적인 디자인 대상이 사람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마땅히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기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경험이 대두되게 된 것이, 디자인이 그만큼 사람들의 경험세계에 대한 인지환경이라든지 이런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을 방증하는 것을 용어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컨대 사용자 경험이란 공간, 사물, 이미지 내지는 어떤 시스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인지적 교감 영역에서 발생한다. 한데, 유사 이래로 이러한 교감 없이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형성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옛날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 문화사의 역사는 각기 시대마다 그 시대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간과 사물 사이의 교감하는 방식을 규정해 왔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와 중세 시대 사이에는 사물과 이미지에 대한 교감의 성격이 다르다)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부분은 '세련되다'의 사전적 정의와 어원을 통해 본 디자인(design)의 개념이었다.
김 교수는 '세련되다'의 사전적 의미를 나에게 물었다. 사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자주 쓰는 말이지만 정작 사전적인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며 당혹해 하는 내 표정을 보며 김 교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서투르거나 어색하지 않고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 닦음. 깔끔하고 품위가 있음. 군더더기가 없이 잘 다듬어짐, 수양을 쌓아 인격이 원만하고 성품이나 취향이 고상하고 우아함”
김 교수는 '세련되다'는 말이 사용자 경험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키워드라고 주장했다. 그 예로 든 것이 아이폰이었다.
"디자인에 있어 마치 장인이 오랜 세월 정성을 들여 정제시킨 군더더기 없는 제품이다. 설익은 디자인이 아니라 농익고 정제된 미학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세련됨이란 이런 것이라 본다. 우리는 세련되었다는 것을 겉만 번지르하고 패셔너블한 디자인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세련됨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다'는 것은 '정제된 디자인'이다. 그렇다면 사용자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 디자이너가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그래서 사용자 중심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김 교수는 "사용자 중심이란 말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디자인의 중심에 인간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디자인일 수 있는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자 중심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동안 디자인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말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사용자 중심 디자인이 별개의 영역에서 새로 출현한 디자인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내가 정의하고 있는 디자인의 개념,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의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디자인의 어원적 개념 ‘de+sign’은 라티어원 디시그라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상징(sign)을 해석(de)하다/해체(de)시키다’의 의미가 중첩된 말로, 기존의 인간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과정을 통해 삶을 해석하고 새로운 상징체계를 창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결국 디자인은 단순히 이쁜 형태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조형적 수단을 넘어서 삶에 대한 해석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용자에 대한 통찰은 결국 디자인 현상의 맥락을 이루는 인간 삶의 전영역에 걸친 통찰력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김 교수는 디자인의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디자이너는 인문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통찰, 과학기술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디자이너의 상은 어떤 것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필로디자인』(그린비 출판사)이라는 자신의 책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에 대한 인문적 성찰이 전제된 디자이너가 있었으면 좋겠다. 재주 많은 사람들은 많지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현혹하는 겉모습 이면에 시각문화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이를 소통하는 디자이너, 또한, 상품미학의 이면에 존재하는 왜곡된 사회와 역사 문제를 다룰 줄 아는 디자이너, 마지막으로, 전통의 힘과 치열한 예술적 혁신으로부터 삶에서 진짜 소중한 가치들을 깨닫게 하는 '문화와 디자인을 제대로 읽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그립다."
(6년 전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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