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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_thoughts

몸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몇 해 전 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짤막하게 정리한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이 글은 그것을 조금씩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알고 있는 바를 글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역으로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오히려 나의 무지를 좀 더 선명하게 그려내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10년 전 어느날)


#1

대학시절 처음으로 원어민 영어강사가 진행하는 영어회화수업을 청강하면서 적잖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몇 가지 단어를 근거로 눈치껏 그 강사가 하는 말을 헤아릴 수는 있었지만 나의 의사를 영어로 표현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나에게 질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얇은 책속에 얼굴을 묻고 그 외국인 강사의 눈길을 피하려했었다. 하지만 그 강사는 짓궂게도 애써 외면하려는 학생들만을 골라 질문공세를 퍼붓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답변하기 위해 엉터리 영어에다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진땀을 흘리곤 했었다. 더듬거리는 말투 못지않게 엉성한 몸놀림이 시작될 때면 그 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No Korean, No Mime!”

 

그렇다. 이 영어강좌에서는 한국말 사용과 몸짓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Only English!” 영어만이 유일하게 허용된 언어였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처럼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엉터리 수화(手話)와 엉거주춤한 율동이 저절로 시작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이런 몸짓언어로 부족한 영어실력을 대신하려는 것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2

성직자와 시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새만금 살리기’캠페인 이후로 ‘삼보일배(三步一拜)’가 하나의 시위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두 달이 넘는 시간동안 부안에서 서울까지, 그냥 걷기도 힘든 거리인 305㎞를 세 걸음에 한 번씩 절을 하며 걷는 삼보일배의 행렬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땀과 피가 얼룩진 삼보일배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행렬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실함 자체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말을 통해 의사를 소통한다는 점이다. 말은 문자로 기록되고 활자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인류가 문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말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말이 지닐 수밖에 없는 의미의 빈틈을 대신 하는 것이 바로 표정이나 제스처와 같은 ‘몸짓’일 것이다. 말이 유용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몸짓’만큼 풍부하지 못하다. 때때로 육체를 갖지 않은 말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3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어느 여름, 대형 강당을 개조해 만든 스튜디오를 몇몇 동료들과 개인 작업실로 꾸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학교는 을씨년스럽게 남겨진 폐광 같았다.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길게 늘어선 복도는 음침한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 풍경은 낯설고 기괴하기까지 했다. 마치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성장을 마치고 떠난 빈 둥지처럼 황량한 폐허를 보는 듯 했다.

 

먼지와 땀이 범벅이 되어 쓰레기더미를 옮기고 있었다. 문득 종아리 뒷부분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무릎 아래정도 높이의 낡은 탁자 위에  유리조각이 놓여있었다. 나의 종아리가 그것을 스치면서 살갗이 찢어진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이 잠시 스쳐갔다.

 

놀라운 것은 통증이 아니라, 처참하게 드러난 속살이었다. 나는 통증에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감춰진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이리저리 상처부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살’이 ‘나’라는 인식이었다.


#4

그날 우연히 경험한 사고는 나에게 복잡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몸’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은 ‘나’라는 정신적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할까?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나’라는 자아는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마모루 오시이(Mamoru Oshii)감독의 애니메이션 걸작 「공각기동대(원제:Ghost in the Shell)」가 던지는 의문과 오버랩되었다.


「공각기동대」는 모토코 소령과 네트워크 속에서 자아를 인식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인형사와의 갈등을 통해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영화「매트릭스」로 이어지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와 그 경계 속에서 표류하는 주체들을 더욱 구체화 해 나간다. 이 두 영화는 주체를 무수한 경험과 이에 대한 기억의 총합으로 표현한다. 결국, 그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지 사라질 수도 다시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


서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보자면 몸이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제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반면 정신 즉,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정신은 몸이 사멸하는 순간 신의 영역에서 영원한 존재로 살게 된다. 그렇다면 몸은 그저 정교한 센서들과 동력장치로 이루어진 기계이거나 ‘나’라는 주체를 매개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5

몸이 그저 하찮은 물질적 존재라면 이성에 대한 몸의 복종을 강요하거나 영혼의 순결을 위해 자학에 가까운 금욕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최고의 선(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행하는 본능적인 자기애(나르시시즘. Narcissism)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몸에 대한 애착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몸을 닦으며 몸의 변화를 살핀다. 검은 머릿결 사이에서 은백색으로 빛나는 새치를 살피며 고단한 하루를 생각하기도 하고, 늘어가는 뱃살을 보며 막연한 불안감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일상은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채워지고 있다.

 

몸에 대한 관심은 더 나아가 무엇을 입을 것인지, 무엇을 신을 것인지, 무엇을 쓸 것인지의 고민과도 연결된다. 이쯤 되면 몸의 영역은 패션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몸에 대한 관심은 또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바를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에 있어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몸에 대한 관심은 관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연결되며 우리의 삶을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몸은 물리적인 실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수단이고 매개로서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이다. 어떠한 몸을 가질 것인가는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1)


#6

“간이 콩알 만해졌다”라든가 “간담이 서늘하다”, “쓸개 빠진 놈”, “목 놓아 울다” 등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신체부위를 통해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은 이외에도 “피도 눈물도 없다”, “눈에 밟히다” 등 무수히 많다. 서양인들은 직관적인 느낌을 “창자의 감(gut feeling)”이라고 표현한단다. 나는 어렸을 때 실제로 ‘마음’이라는 기관이 가슴 속에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서운 것을 보면 가슴이 벌렁 벌렁하고, 꾸지람을 들으면 가슴에 옥죄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과연 생각이나 심상작용과 같은 정신활동과 신체는 별개의 존재일까? (실제 이 부분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미술(美術)’이라는 영역에서는 사물을 보는 방식에 따라 ‘현실성(reality)’ 혹은 ‘사실성(reality)’이라는 문제와 맞닿게 된다. 사물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갖는가는 결과적으로 ‘사실’에 대한 상이한 인식을 낳기 때문이다. 서양적 시각에서 제작된 풍경화는 일상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사진을 닮아 있다. 여기에는 치밀하게 연구된 광학적 지식과 원근법의 원리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의 등장이라는 문화사의 맥락은 서양 회화사(繪畫史)와 맞닿아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Hockney,David)의 「니콜스 계곡(Nichols Canyon) 1980. 데이비드 호크니(Hockney,David)의 「니콜스 계곡(Nichols Canyon) 1980. 산과 풀, 나무들을 보면 측면에서 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밭이나 전체적인 구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 그림에는 고정된 시점이 없다. 객관적 묘사보다는 작가의 주관적 경험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측지도와 메모지에 그리는 약도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실측과 달리 경험에 따라 어떤 길은 더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동양적 시각에서 제작된 풍경은 인간적 경험에 충실한 면이 있다. 즉 사물의 인식에 있어서 개관적인 재현보다는 주관적 경험을 중시해 왔고 그림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그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시각적 차이는 우리의 몸을 정신활동과는 무관한 해부학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서양적 관점이나, 몸을 경험이 축적된 고유한 인격의 부분으로 보는 인식의 차이와 맥을 같이 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물(혹은 세계)과 몸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어떠한 관점을 취하느냐의 문제는 각자가 처한 현실과 맥락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어느 것이 진실이냐를 놓고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각적 차이를 인정하고 두 관점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

수사(修辭)란 말이나 글을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글쓰기의 기법을 의미한다. 연애편지야말로 온갖 수사법들이 총동원된 글이라 할 수 있다. 늦은 밤 깊은 감흥에 젖어 써내려가던 연애편지를 다음 날 아침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읽어보면 왜 그렇게 닭살이 돋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지. 글쓰기에서 수사법은 맛깔을 내는 양념임에는 틀림없지만 너무 과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러한 수사법을 사용한 시어에는 마음을 출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김동명 시인의 시구는 관념적인 사랑의 개념을 ‘호수’로 형상화하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어린 사슴처럼 민첩한 그대 눈동자(바이런의 「어떤 사람에게」)”를 본적이 있는가? 이러한 시구를 통해 독자는 무언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 그 선하고 선한 어떤 눈동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수사가 세계를 인식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당신을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라고 상상하면서 세상을 느껴보자. 물론, 실제 갓난아기의 감각은 오랜 시간 서서히 깨어나면서 세계를 인식한다. 새로운 감각을 익히는 과정에서 부모와의 교감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인 안전장치가 없다면 아이는 심각한 혼란과 불안, 두려움에 빠질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선천적인 맹인이 어느 순간 시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각정보를 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기억할 수 있는 정보는 단 몇 가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시각적 자극을 인지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성장 과정에서 학습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선천적 맹인의 경우 시각정보를 걸러내는 능력을 학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시각을 갖게 되었을 때 매우 혼란스러워하거나 신체적인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세상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몸은 세계를 인식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혼돈스러운 자연 속에서 ‘나’라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물리적 토대이다.


#8

수사법 가운데 의인법이나 활유법은 우리의 신체가 바로 세계를 인식하는 기관임을 시사해준다. 의인법(擬人法)이란 사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간인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적 방법으로 인간이 아닌 생물이나 무생물,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도 인간 또는 인간의 행위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처음 분화하였을 때 그들은 변화무쌍한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자신들의 몸에 빗대어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아이들의 표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비가 오는 것을 ‘하늘이 운다’라고 표현하거나, 가지가 하늘로 뻗은 나무를 보고 ‘손을 치켜들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또한, 전적으로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원초적인 사회인 가족, 특히 부모와의 공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나를 둘러싼 자연이란 곧 나의 부모이자 가정에 빗대어 나름의 표상체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우리는 신화나 설화 속에서 인간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 온갖 알레고리(우의,寓意)들을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예가 그리스·로마 신화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 사랑과 애욕의 신 에로스, 태양의 신으로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로 등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적인 정서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사랑한다. 다중적이고 복잡미묘한 인간의 내면은 알레고리를 통해 구분됨으로써 표상이라는 결정체로 발전해나가지 않았을까.


브론치노의 알레고리브론치노라는 사람이 그린 이 그림에는 다양한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미와 사랑, 어리석음과 변덕, 불성실과 질투 등이 그것이다. 추상적인 관념조차도 생생한 캐릭터로 표현하고 있다.


#9

건축용어에 모듈(module)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건축에서 각 부분의 길이와 비율이 이상적인 것을 일컫는 모듈러스(modulus)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모듈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라는 건축가에 의해서 건축설계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흔히 ‘손을 올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모듈러(moduler)가 그것인데, 이는 인체를 황금비로 분석한 인체비례이다.2)


인체비례를 모범형으로 간주했던 사례는 기원전으로도 소급될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활동한 로마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는 신전 건축의 규준을 설명하는 기록에서 ‘팔과 다리를 뻗으면 기하학적 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들어맞는다’는 주장과 함께 ‘인체비례를 모범형’이라고 했다. 이후 르네상스시대에 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를 바탕으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라는 인간상을 그리기도 했다.


모듈러인체를 황금비로 분석한 모듈러(moudler). 이 그림은 흔히 ‘손을 올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0

인간의 몸은 이상적인 모범형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사물의 길이와 양을 측정하는 기준으로서 활용되어 왔었다. 사물의 길이와 부피, 무게 등을 측정하는 기구를 총칭하여 도량형(度量衡. weights and measures)이라고 하는데, 정밀한 측정기구가 없었던 과거에는 신체의 일부분이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길이로서는 손가락이나 손바닥의 길이로 ‘뼘’이, 부피로서는 한 줌, 두 줌과 같은 단위를 사용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피라미드(BC 3000년 경)와 같은 경이로운 건축물을 많이 남겼다. 이를 미루어 보아 당시 고도로 발달한 도량형 기술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길이의 단위로는 ‘큐빗’이라는 단위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지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의미한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유래된 큐빗은 다시 야드(yard)의 원형이 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량형은 이후 고대 로마나 중세 유럽에서 사용된 여러 도량형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마다 각기 다른 도량형이나 기준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문제가 됐다. 때로는 왕실과 귀족들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도량형을 제멋대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혁명정부는 당시의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도량형을 고치고자 했다. 그래서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인 자오선의 2천만분의 1을 기준 단위로 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된 것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이다. 하지만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오선의 측정에 오류가 발견됐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의 모양도 조금씩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도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이것은 인식론에 있어서 경험주의를 강조한 주장이라고 한다. 좀 더 단순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각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태양의 색깔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붉은 색이라는 사람, 노란 색이라는 사람, 심지어는 파란 색 등 각자가 느끼는 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을 관찰하는 시간과 마음 상태 등에 따라서도 같은 사물은 다르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규준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각자가 고유한 척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1

지금 3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연령이라면 <은하철도 999>라는 TV만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오전에 방영하던 <은하철도 999>는 달콤한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텔레비전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었다. 이 만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기계몸’을 얻기 위해 주인공들이 ‘은하기차’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모험을 겪는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주인공은 기계인간보다는 평범한 인간으로 남는 것을 선택하게 되고, 다시 고향인 지구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은하철도 999>는 비록 아이들이 즐겨보던 만화영화였다고는 하지만 물질만능주의,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 등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주인공들이 펼쳐나가는 모험이야기에 융화시킴으로써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담았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은 <은하철도 999>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 수많은 위협과 난관을 무릅쓰고 추구하는 욕망의 정점일지도 모른다.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일본의 만화가 마츠모토 레이지의 대표작인 'Galaxy Express 999'. 한국에서는 ‘은하철도999’라는 제목으로 방영됐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미 은하기차를 타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욕망의 흔적은 아주 먼 고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대 이집트의 미라(mummy)다. 이 미라는 사자(死者)가 저승에서 영생불사와 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믿음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영원함에 대한 동경은 기하학을 발전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최초로 중원을 평정한 진시황제 역시 불노장생을 준다는 약초를 찾기 위해 헛된 노력을 했었고, 자신의 거대한 무덤 속에 궁을 건설하고 호위병과 군마를 도용(陶俑)으로 만들어 저승에서도 황제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었다. 또한, 화약이 불노장생약을 만드는 중국의 연단술(煉丹術)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잘 알려진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도전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12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을 토대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타임머신’이다. 인간이 생명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타임머신을 이용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못지않은 파격적인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꿈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욕망은 과학을 통해 더욱 현실적인 모습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냉동인간’이다. 냉동인간은 양서류와 파충류 등 몇몇 동물들의 동면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고 있다. 현대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냉동상태로 보존하여 의학이 발달한 미래에 다시 소생시켜 건강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이미 냉동인간으로 보존되고 있는 사람은 수만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을 소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줄기세포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능성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원하는 장기를 만들 수 있다면 노쇠하고 병든 신체를 지속적으로 교체하면서 생명을 무한정 연장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13

과연 인간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직은 이모든 것이 실현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불투명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좀 더 과학적인 설득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여전히 공상에 가까운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과 집착이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오늘의 문명을 이루게 한 동력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문명이 지니는 야만성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었고, 진시황의 욕심으로 역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생매장되었으며, 연단술에서 비롯된 화약은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만들어졌다. 냉동인간을 만들고 이를 보존하는 것 역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고(제로섬사회인 화폐경제체제에서 누군가의 부는 누군가의 가난을 전제한다),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는 여성들과 배아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은하철도999>에서 주인공들이 영원한 생명보다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를 결정하게 되는 결말부분은 조금은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한다. 나름대로 결론을 생각해보면, 생명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갖게 되는 기쁨과 슬픔, 욕망과 애착 등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죽음도, 죽음이 없는 생명도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14

인간은 언제부터, 왜 옷을 입기 시작했을까? 성경의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의 금기였던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로 보자면 최초로 옷을 입게 된 것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옷은 이외에도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인간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극한의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옷의 기능과 종류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잠수복은 해저에서 체온유지와 감압병(DCS decompression disease)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주복은 극심한 고온과 저온을 견디면서 우주복 내부에 적절한 기압을 유지함으로써 신체를 보호해준다. 군복은 보호색과 특수한 재질을 이용해 최대한 몸을 은폐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한편, 유니폼은 그 옷을 입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사회적 역할, 소속 등을 나타내 줌으로써 개인의 개성보다는 조직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처럼 옷은 몸을 보호하고 ‘가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옷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는 우선 사회적 신분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복식(服飾)보다는 브랜드가 이러한 ‘구별 짓기’를 대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연령과 직분에 따라 옷 입는 방식이 다르고 경제적 계층에 따라 역시 옷 입기에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복식에 대한 엄격한 제도를 두고 신분이나 관등에 따라 서로 다른 색과 문양을 옷에 사용했다. 더구나 예를 숭상하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옷 입기는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옷 입기의 엄숙함은 현대사회에서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금배지(badge)와 검은 색 양복’으로 상징되고 있는 국회의사당이 그렇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에 첫 등원하던 날 캐주얼차림으로 등장하면서 보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을 드러내는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었다. 물론, 당시 유 장관은 국회의원들의 항의와 반발로 그날 있을 선서식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5

옷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옷으로 가리고자 했던 ‘몸’도 있다. 몸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아예 몸을 새롭게 구성하기까지도 한다. 옷이 몸을 드러내는 방식은 역설적인 표현에 가깝다. 즉, 옷이 몸을 가리기 때문에 몸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가리지 않는다면 노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옷은 저마다 섹슈얼 포인트를 드러내기 위한 디자인으로 제작된다. 예를 들어, 브래지어(brassiere)는 가슴을 가림으로써 가슴의 존재를 드러내고, 팬티는 성기를 가리면서 성기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단지 가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화려한 장식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상적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성을 갖추는 것도 이제는 의류디자인의 기본적인 설정이 되고 있다.


흔히 옷에 대해 ‘제 2의 피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옷은 제 2의 몸, 제 2의 자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옷의 이러한 각별함은 사십구재 마지막 날 망자의 옷을 태우는 불교의 제식에서 생각할 수 있다. 옷은 그만큼 한 사람의 자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을 태우는 일이 그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에리히 프롬((Fromm, Erich, 1900.3.23~80.3.18)은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페르소나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동시에 소유하고 유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어떤 흔적과 기억은 한 사람에 대한 고유한 추억이 될 수 있다. 옷은 바로 한 사람의 흔적이요, 그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이고, 비로소 그 사람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한명의 인물로서 그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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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성과 자아정체성』 Anthony Giddens 저, 권기돈 역, 새물결, 1997

2) 그는 인체를 황금비(1:1.618)로 분석해서 고전적인 비례개념을 적용시켰으며 이후 공업생산에까지도 적용하게 되었다. 이상적인 인체비례가 되기 위한 비례는 배꼽의 위치가 몸 전체를 황금분할하고, 어깨의 위치가 배꼽위의 상반신을, 무릎의 위치가 그 하반신을, 코의 위치가 어깨위의 부분에서 황금비율에 위치하는 경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