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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 STORY

JFK 암살, 미 국방부와 CIA 연루 가능성

JFK 암살 사건에서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다


JFK 암살에 미 국방부와 CIA가 연루된 뚜렷한 정황이 발견됐다. 주류 언론 어디에도 이 내용을 보도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문건은 미국 독립언론들 사이에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에서 불거진 '가짜뉴스' 논란은 바로 이들 독립언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란 목소리가 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도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18대 대선 당시, 국정원과 군경 등 공권력이 국민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투표지 분류기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진실의 행방은 묘연해지기만 한다. 최근에는 촛불집회 진압과 쿠데타를 모의한 기무사 문건이 발견돼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저들 정보기관과 군을 올바르게 개혁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정치 역시 미국처럼 비선실세(Deep State)의 농락에 놀아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4월에 트럼프 행정부가 공개한 JFK 암살 관련 비밀 문건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포스트를 쓰기 위해 폴 크레이그 로버츠(Paul Craig Roberts)의 정치경제 연구소(Institute for Political Economy)와 인포메이션 크리어링 하우스(informationclearinghouse.info), 리컨시더(reconsider.news) 등에 게시된 글과 이들 매체가 인용한 '케네디 암살의 진실을 찾는 시민들'(CTAKA: Citizens for Truth About the Kennedy Assassination)의 보고서 등을 참고했다.


화려한 휴가최근, 박근혜 탄핵 촛불집해 당시, 기무사가 촛불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과 쿠데타 등을 계획했던 문건이 발견돼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뿐만 아니라, 기무사가 세월호 유가족을 감시하며 이들의 성향과 동향 등을 파악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기무사의 비밀 문건은 광주시민을 잔혹하게 진압한 공수부대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철저한 진상 규명과 이에 따른 확고한 조치가 없을 경우 슬픈 역사는 되살아날 수 있다. 한편, 모종의 목적을 위해 JFK 암살의 진실 규명을 방해하려 했던 미 국방부와 CIA 등 권력기관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비슷한 행태를 드러낸다. 이들은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가 느슨해진 틈을 노린다. (사진출처: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이 이야기에는 두 명의 미군이 등장한다. 한 명은 유진 딩킨(Eugene Dinkin) 미 육군 일병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미 공군의 데이비드 크리스텐센(David Christensen) 상사다. 이들의 용기는 첼시 매닝(Chelsea Manning, 성전환 전의 이름은 Bradley Edward Manning)과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Joseph Snowden)에 견줄만하다. 매닝은 미국 아파치헬기가 이라크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폭로했고, 스노든은 미국 NSA의 '프리즘 프로젝트'를 폭로해 세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이야기 속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속한 부대에서 암호통신과 관련한 직무를 담당했었고, 실제 암살이 자행되기 수 주 전에 이와 관련한 내용을 인지했다. 그리고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이후 두 사람 모두 정신감정이라는 명목 하에 의료시설에 구금됐다.


하지만 당시, 딩킨 일병은 프랑스 메츠(Metz)에 주둔한 59번째 보급대 암호반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크리스텐센 상사는 스코틀랜드 커크뉴턴(Kirknewton)에 위치한 영국 왕립 공군기지(RAF base)의 CIA 청음초에서 활동했었다. 두 사람이 각기 떨어진 지역에서 동일한 내용의 은밀한 계획을 발견했다는 점은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한다.


케네디 암살케네디가 치명적 총상을 입자 경호원이 리무진 위로 뛰어들고 있다. (출처: wikipedia)


딩킨 일병이 이상한 자료를 발견한 것은 1963년 9월 무렵이었다. 딩킨은 군 신문인 <성조기>를 비롯해 인쇄된 여러 발간물에서 케네디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보게 됐다. 어떤 것은 케네디가 소련을 상대하기에는 나약한 대통령이라는, 차라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낫다는 식의 주장을 넌지시 펼쳤다. CTAKA의 보고서는 딩킨이 이들 자료에 대해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전의 일종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자료 중 일부는 군부 고위 인사들과 일부 우익 경제 단체들이 주도하거나, 국영 언론사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 자료를 분석한 결과, 딩킨은 1963년 11월 28일을 전후로 이 음모가 자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암살은 공산주의자나 흑인이 저지른 것처럼 위장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법무장관에게 등기우편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답신이 없었고,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딩킨은 룩셈부르크 주재 미 대사관을 찾았지만 이곳 책임자는 그와 만나주지도 않았을뿐더러, 딩킨이 수집한 증거자료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성과 없이 메츠로 돌아온 딩킨에게 상관들은 1963년 11월 5일에 심리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통지했다. 딩킨은 암살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을 만한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부대를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다.


1963년 11월 6일, 제네바에서도 딩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제네바 디플로마> 등의 신문사 편집자와 면담을 시도하기도 했고, <뉴스위크> 기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외면만 당했다. 다행히 그는 <타임-라이프>와 <라디오 캐나다>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알렉스 데 폰테인(Alex des Fontaines)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었다. 그러나 딩킨의 주장이 언론매체를 통해 대중에 전달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훗날 케네디 암살이 벌어졌을 때, 데 폰테인이 딩킨을 떠올리며 그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딩킨의 케네디 암살 예고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다. 1964년 2월 27일, FBI 항공국은 FBI가 딩킨의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자료를 제출했다. 이 자료는 케네디 암살 2주 전인 1963년 11월 8일에 기록된 것으로 딩킨의 활동 사항이 언급돼 있다. 또한, 딩킨의 활동이 미국 관료들 사이에서 꽤 광범위하게 알려진 정황까지 담고 있다.


모든 정황상 딩킨이 제네바 UN 사무국을 찾아가 언론과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여러 부처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백악관이나 정보기관 등에 암살 음모의 계획이 보고되지 않았다.


딩킨은 복귀하자마자 그해 11월 8일부터 심리검사를 받기 위해 독일 란트슈툴 병원으로 후송될 때까지 구금됐다. 이후 그는 미국 월터리드(Walter Reed) 국영 군의료센터로 옮겨져 제대할 때까지 수개월 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이 기간 중에, 자신을 미 국방부 소속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딩킨을 찾아와 암살 음모와 관련해 모아둔 자료를 요구했다. 딩킨은 자료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구금에서 풀려난 뒤 그 자료가 모두 사라진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유진 딘킹일리노이 대학 어바나-샘페인 캠퍼스 시절 유진 딩킨의 모습(사진출처: Kennedys and King; formerly CTKA). 1977년 미국 하원 특별위원회가 케네디와 킹 목사 암살에 대한 거짓 재조사를 열었을 때, 유진 딩킨은 캘리포니아 엔시노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2012년 천수를 다할 때가지 그는 줄곧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상담치료사로 일했다고 전한다. 그는 케네디 죽음에 언제나 강한 관심을 보였다. 1988년에 그는 암살에 관한 책에 근거해 감상평 등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스코틀랜드 주둔지에서 복무하던 데이비드 크리스텐센 상사도 케네디 암살이 시도될 것이라는 정보를 교신 내용 중에서 발견했다. 크리스텐센은 그 정보를 NSA에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후 정신건강 시설에 억류되고 말았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Lyndon Johnson) 행정부가 이 사건의 조사를 위해 꾸린 워렌 위원회는 리 하비 오즈월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워렌 위원회는 과연 암살 계획을 알고 이를 예고했던 두 명의 미군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드러난 정황상, 결코 모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미군과 관련한 자료들은 50년이 넘게 비밀로 가려져 있어야 했다.


누가, 왜, 이 자료들을 숨겨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