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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 STORY

유럽의 백색테러,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류가 근대에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이 발견은 개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인류는 역사의 광풍 속에서 스스로 퇴행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버리고 집단과 이데올로기에 매몰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두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개인으로서의 자유는 지극히 고독하고 불안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단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집단은 순수한 정체성을 위해 ‘차이’를 제거하는 폭력을 행사한다. 그 폭력은 종종 숭고한 행위로 추앙되기도 한다. 정통 유럽사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노르웨이의 한 청년 역시 자신의 행위를 그렇게 합리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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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기 전, 그는 평범한 32세 노르웨이 청년이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월드 오브 워 크래프트(World of War Craft)라는 온라인 게임을 하며 보내기는 했지만, 사소한 교통범칙도 거의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시민이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인 그는 주말이면 함께 사는 어머니와 꼬박꼬박 교회를 다녔다. 아파트 주민들도 그를 내성적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로 기억했다. 게다가 그는 각종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이자 ‘브레이빅 지오팜’을 운영해온 사업가였다. 당연히, 그가 비료로 사용되는 질산암모늄을 몇톤이나 구입했지만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침착하고 단호한 학살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의 거리에서는 그저 평범한 여름 한낮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슬로는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곳으로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다. 그러나 오후 3시 30분, NTB 통신사가 들어선 20층짜리 건물과 정부청사 사이로 난 도로에서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커다란 폭연이 솟구치며 평범한 일상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건물의 유리창이 쏟아져 내렸고, 뭔지 모를 잔해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몇몇 행인들이 아수라장이 된 거리 위로 뒹굴었고, 또 어떤 이는 피를 흘리며 절규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폭발 직후 노르웨이 정부청사
폭발 직후 노르웨이 정부청사 모습. 폭탄이 설치된 승합차(van)는 사진에 보이는 사람들 뒷편에 주차돼 있었다. (사진출처: Wikipedia)
 
 
오슬로에서 약 30Km 떨어진 우토야 섬에서는 노르웨이 노동당 청소년 캠프가 열리고 있었다. 우토야는 튀리피오르덴(Tyrifijorden) 호수 가운데 떠 있는 넓이 500m 가량의 작은 섬이다. 울창한 수목과 잔잔한 호수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섬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천국의 섬’이라 불렀다. 이날 우토야 섬에서는 노동당 청소년 단체의 연례행사로 캠프가 열리고 있었다.
 
우토야(Utøya) 섬의 모습
우토야(Utøya) 섬의 모습. (사진출처: Wikipedia)

 

섬 한 가운데 자리한 캠핑장에는 형형색색의 텐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섬 곳곳에서 캠프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주제를 갖고 토론을 하거나 누군가의 연설을 듣기도 했고, 또는 음악을 듣거나 작은 운동회를 열기도 했다. 캠핑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나이는 13~18세.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번 행사에는 노르웨이 전국에서 700여명의 청소년들이 모였다.

 
 
오후 5시 30분 무렵. 183cm의 건장한 체구를 한 백인 경찰관이 우토야 섬에 내렸다. 그는 “정부청사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때문에 검문을 한다”고 말하며 섬 주변에 흩어져 있던 청소년들을 불러 모았다. 이 소리를 듣고 청소년 두어 명이 경관 앞으로 다가왔다. 경찰관 제복과 좋은 인상, 아무도 그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순간 백인 경관은 자신의 가방에서 자동소총을 꺼내들고 사람들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가갔던 청소년들은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고, 부상을 입고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확인 사살을 하기까지 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고립돼 있는 작은 섬 안에 숨을 곳은 없었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호수로 뛰어들며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는 도망친 사람들을 쫓아 섬 이곳저곳을 다니며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사냥이라도 나온 듯 그의 행동은 단호하면서도 침착했다. 
 
경찰의 대응은 늦어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희생자는 더 늘어만 갔다. 총소리를 듣고 보트를 가진 몇몇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섬을 탈출한 사람들을 구조했다. 총격이 시작되고 약 1시간이 흘렀을 무렵, 경찰특공대의 섬 진입이 시작됐다. 5명씩 구성된 두 개 팀이 테러범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각각 섬 북쪽과 남쪽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특공대가 섬에 진입하자 테러범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투항했다. 평화로운 캠핑장을 지옥으로 만든 악마라고 하기에는 맥 빠진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68명의 희생자를 내고 우토야의 비극은 막을 내렸다.
 
 
잔혹하지만 필요했다
 
7월 22일 금요일, 세계를 경악하게 한 연쇄테러의 범인은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Anders Behring Breivik)이라는 백인 청년이었다. 극단적인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은 대개 경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살되거나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마련이다. 하지만 브레이빅은 진압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는 바로 투항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테러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침착한 행동이 보여주듯이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변호인을 통해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브레이빅은 2년 전인 2009년 가을부터 범행을 준비해왔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잔혹하지만 필요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끔찍한 일이 광기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의지를 갖고 진행됐다는 사실에 세계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브레이빅은 테러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이는 그가 범행 전에 온라인에 게시했던 ‘2083: 유럽 독립선언(2083: A Europ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s)’이라는 1,518페이지짜리 문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서는 크게 5가지 파트로 구성돼 있다. 그는 선언문에서 서구유럽에 다문화주의(본문에서는 Multiculturalism 또는 Cultural Marxism이라고 언급함)가 성행하는 현상을 짚으며 서구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 서구유럽이 어떤 저항활동(반마르크시즘 또는 반지하드운동)을 하고 있는지, 또 이에 대한 해법이나 전략 등을 제시하며 자신의 극단적인 우익성향을 드러냈다.
 
 
브레이빅은 선언문에서 다문화주의로 인해 이슬람 이주민과 이들의 문화로부터 유럽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맞서 정통 유럽의 단일성(Unity)과 단일문화주의(Monoculturalism), 남성 중심 사회(Patriarchy), 유럽순혈주의(European Isolationism)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과 일본, 대만은 다문화주의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원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단일문화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앞서 있다”고 말하고, 오늘날 이들 나라는 “단일문화적 모델로 인해 가장 평화로운 사회”라고 평가했다.
 
다른 나라에 대한 언급은 차치하고 한국만 보더라도 실상은 브레이빅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우선, 한국인을 단일혈통의 민족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인은 수천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 진출하거나 외세의 침략을 겪으면서 수많은 혈통과 섞였다.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근세까지 이슬람문화권과 교류해왔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슬람 이주민들이 한반도에 정착해 같은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물론, 가부장적인 전통이나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한국 여성주의는 어느 나라 못지않게 활발하다. 또 종교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종교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다. 이는 그의 주장이 잘못된 현실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브레이빅은 선언문 곳곳에서 무슬림에 대해 피해망상적인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무력적인 지하드 운동으로 서구권에 테러가 발생하고 있고, 이들을 허용하는 정치적 공정함(Political correctness)으로 인해 유럽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찬양하며 이러한 위협에 맞서서 성당기사단을 조직하고 무력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서 그는 다문화주의와 무슬림이 득세하는 것에 대해 집권 노동당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정부청사와 노동당 청소년 캠프를 범행 타깃으로 잡았다. 
 
선언문 끝 부분에는 잠수복을 입고 소총을 겨누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비롯해, 군복과 프리메이슨 복장을 입은 사진을 첨부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서 브레이빅이 극단적인 우익사상과 더불어 모종의 음모론에 심취했을 것이으로 짐작된다. 브레이빅의 변호인 역시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하지만 노르웨이 법의학위원회는 그가 오랜 기간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 점을 들어 정신병자일 가능성을 일축했었다. 
 
그러나 한편, 브레이빅을 면담한 두 병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를 ‘망상성 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검찰에 제출된 243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범행 당시 어떤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처형을 실행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는 성당기사단에게 유럽의 권력이 넘겨졌을 때 섭정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노르웨이 참사는 한낱 미치광이의 광기에 의한 비극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무슬림으로부터 유럽을 구하고 싶었다
 
사건 이후 브레이빅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그의 극우적 성향을 언급하는 내용이었지만, 그의 성장과정도 일부 알려졌다. 이런 보도를 종합해보면 그는 과묵하고 수줍은, 그러나 성공적인 청년사업가였다. 학력은 고졸이지만 A학점만 받던 모범생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좋은 인상의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성형을 했다는 기사에서는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브레이빅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외무공무원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1세 때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성과 재혼했다. 두 사람은 브레이빅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했지만 양육권은 그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이후 브레이빅은 자신이 태어난 오슬로에서 줄곧 어머니와 살았다. 그는 여느 또래들처럼 힙합을 좋아했었고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에는 무슬림도 있었다. 공부를 잘해 지금의 노르웨이 왕족이 다녔던 명문고를 다녔다. 그의 친구들은 브레이빅이 다소 반항적이지만 조용하고 명석했다고 회상했다. 
 
평범한 브레이빅을 가장 불행하게 했던 것은 가족들과의 이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에서는 아버지가 프랑스로 떠나고 의지하던 누나마저 미국인과 결혼해 노르웨이를 떠나자 상당히 힘들어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회상을 실었다. 그리고 그가 극우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명석한 브레이빅은 농산물 재배 업체인 ‘브레이빅 지오팜’을 설립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던 2011년 6월 그는 혼자 오슬로를 떠나 헤드마르크 주로 거처를 옮겼다. 바로 그곳이 테러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비료를 대량으로 구입해 폭탄을 만들었고 총기를 모았다. 그리고 약 한달 후, 그는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훗날 사업을 시작한 동기도 범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브레이빅은 변호인을 통해 법정에서 성당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진술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성당기사단은 1차 십자군전쟁으로 점령한 예루살렘과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사단이다. 이들은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색 망토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에게 성당기사단은 아랍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고 유럽인들의 목숨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다. 처음 9명에서 시작했지만 수많은 지원자들과 귀족들의 기부로 순식간에 크게 성장했다는 점은 성당기사단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케 한다.
 
브레이빅은 자신의 테러행위에 대해 “무슬림으로부터 서유럽을 구하고 싶었다”라고 변호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집권 노동당이 무슬림의 이주를 조장하고 있다며 이를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즉, 브레이빅은 이슬람이 유럽을 점령하는 것에 맞서 성당기사단을 자처한 셈이다. 그래서 수십명을 살상하고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7월 25일 오슬로에서 열렸던 법원 심리에서 또 다시 성당기사단의 제복을 입게 해줄 것과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했었다. 법원의 심리 과정도 자신의 뜻을 알리는 기회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꽃을 들고 모여든 행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꽃을 들고 모여든 행렬. (사진출처: Wikipedia)
 
유럽의 우경화와 백색테러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테러활동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서구사회에 브레이빅의 백색테러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유럽에서는 종종 신나치주의자들에 의해 유색인종에 대한 테러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 독일에서는 ‘국가사회주의지하조직’이라는 테러조직이 발각돼 독일 사회가 경악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터키와 그리스 이주민을 비롯해 여성 경찰관을 살해했고 은행강도와 폭발물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이 테러조직을 지원한 곳이 나치를 추종하는 독일민족민주당으로 밝혀져 독일 사회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또, 지난 2011년 12월 13일, 이탈리아에서는 이민자에 대한 반감으로 총격을 가해 두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고는 쟌루카 카세리라는 50세 극우성향의 작가가 피렌체의 한 재래시장에서 세네갈 출신인 노점상에게 권총을 난사한 사건이다. 카세리는 범행 직후 자살했다. 경찰은 카세리의 범행 이유에 대해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을 증오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했다. 
 
2011년 5월에는 그리스에서 이주민들이 검은색 셔츠를 입은 수백명의 괴한의 공격을 받아 수십명의 중환자가 발생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인종폭력이 매일같이 벌어지자 유엔난민최고대표(UNHCR)는 그리스에 인종폭력에 대한 경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럽은 최근 발생빈도와 폭력의 수준을 더하고 있는 백색테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백색테러는 주로 이주민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슬람계 이주민들에 대한 적개심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된 시점은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부터다. 그리고 그 후 스페인 마드리드와 영국 런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테러로 목숨을 잃으면서 유럽 내에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문화적 충돌로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으로 이슬람계의 이주가 늘어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유럽은 이슬람계의 이민에 관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많은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 되자 유럽은 이민에 더욱 허용적인 입장이 되었다. 게다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정치적 불안이 커지면서 유럽으로 망명하거나 이주하는 이슬람계는 증가해왔다. 알려진 바로는 유럽연합(EU) 거주자 가운데 약 4%인 2,000여만명이 이슬람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슬람계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유럽에서 문화적 충들은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성차별을 이유로 히잡이나 부르카와 같은 전통 이슬람 의상을 금지시키는 일도 있었다. 벨기에나 독일, 영국 등 타 유럽국가에서도 이런 이슬람식 복장이 문제가 되었었다. 2006년 영국에서는 니캅을 썼다는 이유로 여성교사가 정직 처분을 받았는가 하면, 독일에서는 부르카를 입은 여학생들이 정학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또,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를 비하하는 만평이 게재되어 유럽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이민에 관대했던 유럽에서는 이제 다문화정책을 실패로 보는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슬람 복식에 대한 금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의회는 동물보호를 이유로 이슬람식 도축방식인 ‘할랄(Halal)’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럽연합 내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셍겐조약에 가입한 덴마크 의회는 국경통제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은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유럽에서 지속되는 경제적 어려움 또한 이슬람계 이주민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유로화가 도입되고 특히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구조는 더욱 취약성을 드러냈다. 유럽공동체 내의 비균형적인 산업구조에 따라 남유럽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채무가 늘어나게 됐고, 통화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충분한 재정건전성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지금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또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회안전망에 대한 비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빈부격차와 실업률, 사회적 불안 등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인들의 분노는 출구를 찾게 되었고, 이슬람계 이주민은 이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표적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유럽은 경제 위기 속에서 급속하게 우경화되고 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유럽의 극우주는 더욱 세를 키우며 조직화, 정치세력화되고 있다. 그래서 유럽 경제위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그리스에서 극우폭력이 횡횡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유럽 우경화의 기저에는 기독교적 전통을 가진 유럽사회가 이슬람 이주민과 이들의 문화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감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안전한가?
 
백색테러는 먼 외국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백색테러의 예는 많다. 자유당시절 정치깡패들에 의해 야권 인사에게 가해지던 린치가 이에 해당한다. 1987년 군사정권 시절에는 야권을 결집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려 하자 정치깡패 150여 명이 난동을 부리며 폭력을 저지른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알려진 백색테러가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회 회원들에 의한 폭력행위가 종종 이슈가 되기도 한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초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7월 1일, 이들은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진보신당 당사에 난입해 “빨갱이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지르며 기물을 부수고 당직자와 당원을 폭행하는 일이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폭력적인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개심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특히, 일용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피해의식이 커지고 있는 추세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한국인 노동자보다 값싼 이주노동자 고용이 선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은 한국도 테러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우리 사회는 이미 이념적 갈등을 비롯해, 빈부격차, 고용시장의 침체 등 위력적인 화약을 안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이 한국사회에 대폭발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폭탄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폭제를 찾아 제거하는 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폭탄의 잠재력을 완화하거나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Anders Behring Breivik)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Anders Behring Breivik)
 
 
※ 관련 이야기: "악마의 미소: 노르웨이 백색테러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