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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 STORY

Occupy Wall Street, 세계 99%가 길을 묻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올 9월 17일 미국 뉴욕의 금융가에서 일어난 시위다. 이 시위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아랍의 봄’을 촉발시킨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과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스페인 캠핑Spanish Acampadas 시위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세계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시위 현상을 두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현 체제가 어떠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 라고. 



미국판 타흐리르 광장이 되자

9월 17일 종이 박스에서 밤을 세운 100~200여 명을 포함해 천여 명의 시위자들이 월스트리트 금융가에 위치한 '주코티 공원'Zuccotti Park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미 금융가의 부패와 탐욕에 항의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시위는 캐나다의 '애드버스터'Adbuster라는 단체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주로 경제나 사회적 불평등 등 문제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였고, 애초에 2만여 명의 시위자를 모아 월가 일대를 수개월 동안 점령해 미국판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으로 만들고자 했다. 

한편, 이번 시위는 이미 예고되고 있기도 했었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들은 이집트와 스페인의 폭발적인 시위를 지켜보며 심각한 청년실업을 겪고 있는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곧 애드버스터를 주축으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가 기획되었고, 사회의 부를 장악한 1%의 부패와 탐욕 성토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되었다.

9월 19일 시위 세 번째 날 뉴욕시 경찰은 시위대가 월스트리트 일부에 대해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마스크를 쓴 두 명의 시위자는 뱅크오브아메리카BAC : Bank of America Corp가 자리한 건물로 진입하려다 체포됐다. 또, 어떤 시위자들은 경찰 저시선을 뛰어넘는 등의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렇게 이날 시위에서 최소 일곱 명이 체포되었다. 

뜨거워지는 시위 열기, 단호한 경찰 대응

그리고 시위가 2주째 접어든 9월 24일, 월가점령 시위대는 도로를 점거하며 무질서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최소한 8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경찰의 강제 진압 장면은 동영상과 사진파일에 담겨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었다. 여기에는 페퍼스프레이pepper spray를 얼굴에 맞아 고통스럽게 쓰러진 여성과 피를 흘리며 제압당하는 시위자 등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시위대열에 합류하는 시민들도 늘어났다. 

한편, 유명인이 참여하면서 시위는 더욱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의료보장제도를 신랄하게 파헤친 다큐멘터리 식코Sicko(2007)의 감독인 마이클 무어Michael Moor가 26일 저녁 시위대에 참여했고, 28일에는 진보적인 정치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할리우드 여배우 수잔 서랜든Susan Sarandon이 시위대에 합류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서랜든은 한 인터뷰에서 시위대와 한목소리로 월 스트리트를 비판하며 “인간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8일에는 캐빈크루CabinCr3w라는 해킹단체가 골드만삭스Goldman Sachs를 공격해 최고경영자와 임직원의 정보를 대량으로 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0월 1일,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는 2천여 명을 넘어설 정도로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어 갔다. 이날 시위대는 브루클린Brooklyn 다리로 모여 차도를 점령하고 행진하며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뉴욕경찰은 이에 물러서지 않고 이날 700여 명을 연행하며 강경하게 대응해나갔다. 그리고 시위대는 동계위원회Winterization Committee를 조직하는 등 점점 더 조직화되었고 노골적으로 장기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또한, 시위는 뉴욕을 벗어나 로스앤젤레스와 보스턴 등 미국 주요도시로 확산되었으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시위에 참가하는 계층도 더욱 다양해졌다. 10월 2일에는 뉴욕 공립학교 교사들이 주코티 공원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노조단체의 합류, 그리고 확산

시위는 3주째 접어들었지만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10월 5일, 시위 참가자는 1만여 명에 달했다. 이날 미국의 산업 및 직능별 노조단체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지는 양상을 보였다. 미국 최대 노동조합인 산업노조총연맹AFL-CIO에서부터 뉴욕시 교원노조, 자동차 제조업 노조 등이 가세했다. 뉴욕시립대 교직원 단체와 전국간호사연맹NNU 등 다양한 단체 및 조직의 대표들도 시위 참가를 선언했고, 러스 파인골드 상원의원과 존 라슨 하원의원 등 민주당 정치인들이 시위에 동조하는 등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정치적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10월 6일, 이날은 백악관 옆 프리덤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날이다. 며칠 전부터 ‘DC를 점령하라'Occupy DC라는 구호와 함께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이날은 약 1천여 명이 참가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곳에 위치한 뱅크오브아메리카 은행 지점에 '리펀드 캘리포니아'라는 시민단체가 난입해 연좌 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세인트루이스에서도 시위대가 뱅크오브코리아 은행을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시위 양상은 더욱 다변화되었다. 어떤 시위자들은 국방분야에 대한 미국의 과다한 지출에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DC에 위치한 항공우주박물관을 찾았다가 경비요원들과 충돌을 빚었다. 10월 11일에는 시위대가 미국의 대표적 1%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진출해 억만장자들의 집 앞에서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더욱 확산돼 나갔다. 이들의 구호와 타깃은 다양해졌고 더욱 구체화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10월 15일. 이날은 시위대가 국제행동의 날로 정한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여의도를 점령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금감원이 자리한 여의도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에서도 금융자본에 반대하는 시위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다. 일본의 경우 경제적 격차에 대한 문제보다는 탈원전이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10월 29일에는 11월 3일과 4일 이틀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를 앞두고 세계 곳곳에서 시위가 재개되었다. 시위의 진앙지인 뉴욕에서는 폭설이 내려 대규모 참가자를 모으지 못했고, 세계 곳곳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양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11월 2일, 뉴욕의 시위 현장이 다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오클랜드항 인근에서는 더욱 과격한 양상을 보였다. 오클랜드항은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물동량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시위가 총파업운동으로 번졌고, 이로 인해 항구가 마비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곳에서는 시위대 가운데 한 명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두개골 골절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구나 상해를 입은 시위자가 이라크 참전 용사로 밝혀지면서 많은 격분을 샀다.



첫 번째 성과, 대형 은행의 굴복

11월 5일에는 이번 시위에서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시위대는 이날을 금융권의 탐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아 ‘은행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로 정했다. 대형 은행의 계좌를 지역의 소형은행이나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신용협동조합으로 옮기자는 움직음은 지난 9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시용협동조합에는 65만 개의 신규 계좌가 늘었고 예치금액은 우리 돈으로 약 5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계좌 옮기기 운동이 확산되자 이 운동의 원인이 되었던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직불카드 수수료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11월 12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가 열렸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등 21개국 정상들과 화이키키 해변 리조트에서 열린 만찬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날도 400여 명의 시위대는 반 세계화를 외치며 만찬장 밖에서 집회를 가졌다. 또, 만찬장에는 마카나Makana라는 하와이의 유명 가수가 만찬장에서 ‘알로하를 점령하라Occupy with Aloha’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워싱턴DC의 정치가와 기업의 탐욕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우리는 다수'We are the many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위 진압대의 무차별 공격

11월 15일, 뉴욕 경찰은 결국 주코티 공원에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기로 결심했다. 강제해산의 명분은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위생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철거를 진행하겠다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한 다음, 바로 철거에 들어갔다. 이날 경찰의 시위대 해산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5명의 기자와 200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어야 했다. 

경찰의 진압 방식은 이미 과격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틀 전인 11월 13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동조시위를 준비하고 있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자동화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시애틀에서는 레이니Dorli Rainey라는 84세의 할머니가 시위에 동참하다 경찰이 뿌린 최루액을 얼굴에 뒤집어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레이니 할머니는 시위대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우리는 99%!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상징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많은 미국 국민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금융회사를 살리기 위해 7천억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월스트리트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경제가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청년 실업률은 20%에 육박하고 있고, 빈곤 인구는 약 5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빈부격차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데, 금융위기의 주범이었던 금융회사들은 고액의 연봉 잔치를 벌이는 등 국민들의 희생과 고통을 외면해왔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미국인들의 이런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위대는 금융을 독점하고 있는 1%의 부자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99%’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우리가 누구냐고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우리 가운데 한 명일 가능성이 99%입니다.” 

이글은 웹사이트 ‘우리는 99%'We are the 99 percent에 게재돼 있는 소개문의 일부다. 웹사이트에는 11월 24일까지 3천2백25 건의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학생에서부터 주부, 은퇴한 노부부, 실업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필로 작성한 글과 함께 사진 등을 올렸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무엇보다도 1%가 부를 독점하고 지배하는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는 것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점령하라’는 세계 각국의 도시로 번지면서 부의 불균형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시키며 많은 동조세력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불평등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점령 대상을 더더욱 확대해나갔다.

사회의 포괄적인 문제로 확산

점령 시위는 당초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와 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로 시작됐다. 대량 해고와 주택압류의 증가, 소득의 감소 등 미국의 중산층은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을 갚지 못해 은행에 압류된 주택이 모두 450만 가구라는 조사도 있다. 게다가 주택가격까지 하락해 은행은 주택을 처분하더라도 대출금을 모두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집을 압류당한 사람들은 거리로 내쫓기고도 은행으로부터 빚 독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위 구호는 좀 더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요구는 점점 구체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들은 부자와 기업에 과세를 늘려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정부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있는 전쟁을 중단하고 국방비 지출을 삭감하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기업 복지가 아니라 의료복지를 강화해 달라는 요구에서부터 노동자 권익 보호, 사회안전망 강화 등 매우 다양한 목소리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물론, 점령 시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시위가 좌파단체들이 마음 놓고 활개 치는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또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길 좋아하거나 군중심리에 휩쓸린 무리들이라며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점령 시위대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내의 한 일간지 사설에서는 점령 시위의 양상이 ‘68혁명’을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68혁명은 파리 근교에 위치한 대학의 사회학도들이 “우리는 자본의 파수견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으로 촉발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세계로 확산됐다. 그리고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사회문화적인 개혁운동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학교육의 대중화와 여권 신장 등 다양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점령 시위가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68혁명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세계는 그 파급효과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