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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 STORY

제이 엘리엇이 기억하는 스티브 잡스

애플 전 수석부사장 제이 엘리엇애플 전 수석부사장 제이 엘리엇

2011년 11월 9일과 10일 이틀간 지식경제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주최하는 ‘테크플러스 2011(tech+ 2011)’ 포럼이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테크플러스는 행사가 열린 이틀에 걸쳐 약 7,000여 명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데 ‘기술과 나의 만남, technology@me’라는 주제를 갖고 기술과 인간의 소통을 중심으로 한 산업기술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제이 엘리엇(Jay Elliot) 전 애플 수석부사장이 강연자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애플 마니아들은 스스로를 '광신도'라고 일컫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브랜드 충성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애플의 전 수석부사장이었던 제이 엘리엇은 모든 것이 스티브 잡스의 열정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의 신화를 만든 주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이리더십』(iLeadership)'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제품개발, 인재채용, 조직문화, 브랜딩 등 애플의 전반적 경영을 책임진 핵심인물이었다.

왼손잡이 스티브 잡스의 왼팔, 제이 엘리엇이 기억하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 이야기는 그의 강연을 재구성한 것이다. 

우연한 만남과 모험의 시작

엘리엇은 IBM을 비롯해 인텔 등 IT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기업에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꼭 맞는 일자리에 대한 미련을 항상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아내와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간 어느 식당에서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IBM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25세의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컴퓨터에 대해서 잘 아세요?”

“네, 컴퓨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여서 잘 알죠.”

“저는 스이브 잡스에요, 애플컴퓨터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죠.

엘리엇은 생소한 이름을 듣고는 어리둥절했다. 그 어린 청년은 리바이스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어딘가 촌스러운 외모였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할 때면 그의 눈은 무언가 모를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저는 개인에서 개인으로 정보를 이동시킬 수 있는 데스크톱을 연구하고 있어요. 애플컴퓨터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죠.”

컴퓨터의 미래, 그리고 그것이 바꾸어놓을 사람들의 일상이 어떤 것인지 등등, 그의 이야기에 엘리엇은 금방 빠져들고 말았다. 엘리엇도 유수의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며 경험했던 이야기와 그 속에서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엘리엇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엘리엇에게 수줍은 듯 제안을 했다.

“당신 참 마음에 듭니다. 저랑 일하시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엘리엇은 그 청년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어쩌면 멋진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더구나 이날 두 사람 모두 히피처럼 자유분방한 의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광경을 보고 히피그룹의 멤버들이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엘리엇은 스티브보다 12살이 더 많았고, IBM과 인텔에서 임원으로 재직했었다. 엘리엇은 순간 ‘25살 애송이랑 일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스티브의 열정과 비전, 야망을 보고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엘리엇은 스티브 잡스와 우연한 첫 만남을 회상하며 “시작이야말로 열린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의 처음 모습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바로 다음 기회, 다음에 내가 만날 사람에 대해서 항상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면 저처럼 여러분도 멋진 순간이 찾아올 것입다.”

 


 

현실로 다가서는 그들의 꿈

결국 엘리엇과 스티브는 식당에서 나누었던 꿈을 하나씩 실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2를 를 만들었다. 각 가정의 책상 위에 컴퓨터가 놓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혁신이었고, 바로 여기서 정보혁명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PC가 등장하면서 컴퓨터는 실생활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최초의 PC, 애플2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했다.

“좀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플로피디크 드라이브, 모니터, 키보드를 갖춘 것이었죠. 비지캘크라는 최초의 금융앱이 있었고 애플2의 주요 매출을 차지하였습니다. 또 이것을 사용했던 유저들 중에 교사들이 정말 좋아했죠. 교수법에 있어서 중요 도구였고 또한 게임도 할 수 있었던 컴퓨터였습니다.”

1980년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스티브는 갑자기 엘리엇에게 팔로알토(Palo Alto)에 가자며 연락해왔다. 제록스 개발센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들은 컴퓨터 사용방식에 있어서 커다란 혁신이 될 놀라운 물건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우스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컴퓨터 사용을 두려워허지 않고 편리하게 쓸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던 스티브에게 마우스는 ‘바로 이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엘리엇은 마우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스티브는 마우스를 보자 편리한 인터페이스 기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것이라면 세 살짜리 아이부터 90세 할머니까지, 누구나 편하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정말 혁명이 일어났죠. 4년 후, 우리는 매킨토시와 함께 마우스를 출시했어요. 비록, 마우스는 제록스가 만든 것이지만 혁신은 우리가 만든 셈이죠.”

Apple II, 출처: 위키백과Apple II, 출처: 위키백과

내가 사고 싶은 제품을 만들어라

IT 분야에서는 제품 개발에 앞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가장 신중하게 결정한다. 컴퓨터가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는 만큼, 사용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직관적인 인터페이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있어서도 애플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무렵에 애플은 매킨토시 팀을 TFT로 구성했었다. 이 팀은 특별히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스티브는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 특유의 개방적인 사고가 사라지고 패쇄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재를 통해 애플은 더욱 편리한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애플은 매킨토시를 출시하기에 이른다. 매킨토시는 기존의 애플 컴퓨터에서 더 혁신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컴퓨터와 키보드, 디스크 등은 모두 별도로 파편화된 것들이었지만 매킨토시는 이 모든 것을 패키지로 구성해 사용성을 높혔다. 또, 맥킨토시는 최초로 스피커를 장착한 컴퓨터였다. 맥킨토시는 스피커를 통해 “안녕, 나는 매킨토시입니다”라며 세상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이때부터 스티브는 우리에게 각인돼 있는 익숙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서 신제품을 소개하는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엘리엇은 매킨토시를 개발하던 시절의 스트브를 이렇게 회상했다.

“스티브는 손을 신기하게 생각했었죠. 회의를 할 때에도 스티브는 자기 손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스티브는 손이야 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우스가 그런 손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그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스티브는 자신이 만드는 제품에 대한 열정을 강조했다. 어떤 회사가 제품을 만든다면 그 회사 사장이 그 제품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리더십에서 중요한 점은 자기가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스티브의 주장이었다. 



시련, 그리고 새로운 출발

매킨토시가 발표되고 애플은 존 스컬리를 CEO로 영입하게 된다. 매킨토시는 나름 훌륭한 컴퓨터였지만 IBM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스티브와 존 스컬리의 불화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스티브는 해고 되고 애플을 떠나게 되었다. 엘리엇은 스티브의 해고에 대해 이사회에 항의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가 어디 있습니까? 스티브는 애플의 창립자이고 선구자인데 해고라니요? 스티브는 애플의 미래이고, 애플은 항상 스티브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엘리엇도 해고되고 말았다.

스티브는 애플을 나와 넥스트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전혀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가격이 매우 비쌌고 결국 또 다시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하지만, 엘리엇은 두 번의 실패가 스티브에게는 약이 되었다고 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티브는 다시 방향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만들며 항상 생각했던 사용자 중심의 원칙을 스티브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엇은 어느 날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를 만났다. 그는 픽사(PIXSAR)라는 회사를 매각할 곳을 알아보던 중이었고, 엘리엇은 스티브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 생각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리고 스티브는 픽사를 매입하게 된다. 리더십과 목표가 분명했던 스티브는 픽사를 통해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픽사에서는 최초의 3D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Toy Story. 1995)’를 만들었고, 이 작품은 전 세계 영화산업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2천만달러에 매입됐던 픽사는 디즈니사에 55억달러로 매각되는 놀라운 실적을 거두게 된다. 엘리엇은 당시 스티브잡스의 재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 잡스의 정신과 리더십을 생각해보면, 그의 리더십은 무언가 산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디지털 허브의 꿈

스티브가 가장 존경하는 영웅은 헨리포드(Henry ford)였다.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단지 말보다 빠른 교통수단이 나왔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헨리포드에 의해 자동차 산업은 바뀌었다. 그는 1913년 조립라인 방식을 최초로 도입해 대량 양산체제를 갖춘 포드시스템을 확립함으로써 자동차 대중화를 앞당겼다. 포드는 사동차산업 자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되고 있다. 스티브는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그 산업을 탈바꿈 시킨 사람을 동경했다.

그런 그가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2001년 무렵, 엘리엇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했을 때 스티브는 ‘디지털 허브’라는 말을 꺼냈다. 스티브는 모든 정보가 허브로 집결하고 사용자들은 다양한 기기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오디오와 카메라, 컴퓨터 등 다양한 디지털 가전이 디지털 허브와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엘리엇이 스티브의 구상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스티브가 또 한 번 해내겠군.’

스티브는 애플로 다시 돌아오자 당시 나름 인기를 끌고 있던 뉴턴이라는 PDA를 철수시킨 바 있다. 디지털 허브는 모든 제품이 같은 동기화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제품의 구체적인 디테일까지도 매우 집중했다. 스스로 만족할 만큼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에 내놓지도 않았다. 시장에 나와 있는 제품이 기껏해야 대여섯 개 정도, 그는 이 가운데에서 세계 최고가 아니라면 용납이 안 되었다.

사용성은 여전히 스티브에게 가장 큰 화두였다. 그는 사용자가 제품을 박스에서 꺼냈을 때 매뉴얼을 읽지 않고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직관적인 사용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는 굳이 사용자 매뉴얼이 필요하다면 12학년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며 12학년을 초빙해 사용자 경연을 열기도 했다.

디지털 허브는 음악 서비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스티브는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애플의 로고도 비틀즈의 애플레코드사에서 따온 것이다. 워크맨이 한참 인기를 모으고 있을 당시, 경량화된 디지털 기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시제품이 너무 크다며 스티브는 그것을 어항이 집어넣어버렸다. 

“이것 봐. 빈공간이 있으니 이렇게 공기방울이 올라오잖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아이팟이다. 그리고 아이튠즈는 다른 기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가 되었다. 당시 음악산업이 음원보호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스티브는 음악산업을 돕고자 했고, 아이튠즈에서 99센트에 음원을 팔게 됐다. 그리고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출시되었고 디지털 허브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듯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그리고 애플의 꿈

스티브는 괴짜로 많이 알려져 있다. 쉽게 직원을 자르거나 마음대로 프로젝트를 뒤집어버리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애플 직원들 사이에서 생겨난 유행어가 “잡스에게 당했다”라는 말이다.

제이 엘리엇이 처음 스티브와 만났을 때에는 12살이나 어린 애송이였지만, 그는 엘리엇에게도, 애플의 직원들에게도, 그리고 애플 사용자들에게도 드라마틱한 꿈을 꾸게 한 혁신적인 동료였다. 엘리엇은 스티브 잡스가 성과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애플에서는 해군이 돼서는 안 되고 해적이 되자고 합니다. 작게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스티브와 얘기할 때 느꼈던 것은 출신학교나 배경이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했던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등 그 사람에게만 집중했습니다. 팀들의 성과에 대해서도 곧잘 인정해주었죠. 처음 매킨토시를 만들었을 때, 초기 개발자 이름을 그 후드 밑에 새겨놓았었죠.”

엘리엇의 강연은 서서히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스티브에게 편지 하나를 썼습니다. 앞으로 건강문제 즉, 맥박이나 방사능 수치, 자외선 등을 체크해주거나 인생에 긴밀하게 접목되는 기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스티브는 제 편지를 직원들에게 돌리면서 우리 이런 것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더군요.”

엘리엇이 말하는 애플의 과제는 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스티브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애플스토어에 꽃을 남기기며 애플과 스티브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애플이 세계와 인생의 문제에 보다 접근하는 것은 애플을 사랑하는 바로 그들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다.


※ 자료제공 : 한국산업기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