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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관의 기개

태조 4년 1396년, 태조는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를 하고 말았다. 태조는 사관(史官)을 찾아 자신이 말에서 떨어진 기록을 지워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사관은 그 내용을 지우지 않았을뿐더러 태조가 간청한 내용까지 기록했다. 이렇게 사관은 사실을 기록하면서 임금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가졌다. 이 글 역시 조선의 사관이었던 채세영 선생에 관한 이야기로, 당시 기록에 대해 엄중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글은 2011년 의왕시 홍보 간행물을 위해 작성된 것이다.


위훈삭제 사건


정축년(1517년) 설 즈음의 어느 날, 중종이 조강(朝講)에 나와 학문을 논하던 때였다. 이날 홍문관의 강연관(講筵官)들은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문제를 거론하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시독관(侍讀官)을 맡고 있던 조광조(趙光祖)는 훈구공신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들의 간사함을 꼬집기도 했다.

 

“정국공신을 정하며 벼슬과 상이 함부로 정해지다보니 훈신이라는 작자들이 공명과 이욕에 눈이 멀어 간사한 꾀를 내고 있습니다. 지금 그 근원을 막지 못하면 사람들이 의리가 중한 것을 모르고 공명과 이욕만 좇을 텐데, 그 폐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조광조의 뜻을 받아들인 중종은 반정 공신 117명 가운데 공로가 뚜렷하지 않은 76명의 작위를 없애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를 나라에 귀속시키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불씨가 된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이다.

 

기묘년 사림에게 닥친 화


기묘년(1519년) 11월, 이미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은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되짚어보려 했지만 황망함에 몸이 떨리고 입술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그는 좌의정 안당을 비롯해 여러 대간(臺諫)들과 궐로 들어섰다. 이들 가운데에는 지난날 사림파(士林派)의 위훈삭제(僞勳削除)로 탄핵되었던 홍경주도 섞여있었다.

 

중종의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초췌해 보였다.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름이 가득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훈신(勳臣)들의 손에 이끌려 왕좌에 오르고 지금까지 그의 곁에 조광조와 같은 인물은 없었다. 반정(反正) 이후 저마다 위훈(偉勳)을 나누며 재물을 탐하기 바빴지만, 조광조는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정을 바로잡아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중종은 이제 겨우 삼십대 후반에 들어선 그를 종2품 대사헌(大司憲)에 앉힐 만큼 신임했었기에 심난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광필은 중종에게 조광조와 사림에 내려진 벌을 다시 생각해줄 것을 간청했다. 


“전하, 저들은 전하께서 직접 높은 벼슬을 내려 요직에 두고 신임하셨사온데, 어찌 하루아침에 내치시려하십니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이 임금의 마음이거늘, 하물며 저들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오. 내가 어찌 죄주고 싶겠소?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러자 정부(政府)와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가 입을 모아 임금의 덕에 누가 될 수 있으니 조광조와 사림에게 내린 벌을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중종은 전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조광조 등이 당초에 나라의 일을 그르치고자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조정에서 이와 같이 벌하기로 하였으니 그대로 따르시오. 조광조와 김정은 사약을 내리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백대에 처한 다음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벌을 내리고 멋 곳에유배하시오.”

 

사필(史筆)의 엄중함을 묻다


대간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중종에게 과한 처벌을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 조광조와 사림에 대한 처벌이 못마땅하다고 생각한 이들은 대간들 외에도 또 있었는데, 그들은 임금의 정무를 기록하던 기사관(記事官)들이었다. 기사관 채세영과 (蔡世英)과 이공인(李公仁)은 기록의 엄중함을 내세워 숙고해주길 중종에게 청했다.

 

“조광조 등에게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나라의 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대신에게 다시 물어서 판부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러나 중종은 이미 상세히 의논하여 정한 것이니 그대로 판부하라고 명했다. 채세영은 망설였다. 그가 생각해도 조광조는 그런 벌을 받아야 할 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가승지 김근사(金謹思)가 채세영을 살피는가 싶더니 그의 붓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중종이 이른 대로 판부하려하자 채세영은 다시 붓을 빼앗아 그에게서 멀리 물러서며 항의했다.

 

“이 사필(史筆)은 아무나 쥘 수 없는 것입니다.”

 

기록의 지엄함을 두고 벌어진 망극한 행동을 꾸짖는 채세영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단호한 그의 항변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은 숙연해졌고 채세영은 중종에게 거듭 숙고해줄 것을 간청했다.

 

“이것이 큰일이나, 전하의 명이 한 번 내려지면 고치기도 어려운 것이니, 대신을 불러서 의논하게 하소서.”

 

채세영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림에게 내려진 벌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조광조는 능주(綾州 : 전라남도 화순)로 귀양을 가고 얼마 되지 않아 사약을 마셨다. 조광조와 뜻을 함께 했던 김정(金淨),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金湜) 등은 귀양 갔다가 사형을 당하거나 자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광조를 두둔했던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해 여러 대간들이 파직을 당해야 했다. 물론, 임금 앞에서 사필을 지키려 했던 채세영 역시 파직될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 당시 사관(史官)이었던 채세영은 이 일로 파직을 당했지만, 그의 행동은 많은 선비들로부터 참된 군자의 기개로 칭송받았다. 포일동 청계정수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채세영신도비문(神道碑文)에는 그를 두고 군자의 인품을 닮은 소나무에 비유한 내용이 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 즉, "세밑 추위를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비문(碑文)은 우리에게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전서(篆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 허목(許穆)의 필체로 새겼다고 한다. 따라서 채세영 신도비는 조선시대 서예사(書藝史)를 연구하는 귀중한 유물로도 평가되고 있다.

 

참고-----------------

1) 조선실록 중종 27권, 37권(sillok.history.go.kr)

2) 해동잡록(海東雜錄) 본조3 (本朝 三) 채세영편,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3) 의왕시사(義王市史) 제2권 인물과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