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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_ongoing/◎CIA와 미디어

CIA & Media: [2편] 세계가 알아야 할 50가지 팩트(1에서 10)


제프리 존스[각주:1]는 CIA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가 미국 아이젠하워[각주:2]가 취임한 1953년부터 피그만 침공[각주:3]이 실패한 1961년까지라고 지적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CIA의 비밀공작을 흡족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공작은 막대한 비용과 인명을 희생해야 하는 재래식 전쟁을 피하면서 외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재임 동안 CIA는 이란 팔레비 정권 옹립(1953), 과테말라 전복 공작(1954), 헝가리 의거 배후 조종(1956),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 전복 공작(1958) 등을 수행했다. (참고: 미국의 비밀공작<부록>, 『현대국가정보학』, 전웅, ㈜박영사, 2015)

CIA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사무국)의 후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9월에 트루먼[각주:4]이 창설했다. 당시 한국은 신탁 통치 문제와 남북 단일정부 수립 등 다양한 정치적 의제가 격돌하며 매우 혼탁한 상황이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정국 속에서 테러와 암살이 횡행했고, 그러는 가운데 송진영, 여운형, 김구 등과 같은 민족 지도자들을 잃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특히,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당시 포병사령부 장교)가 미국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의 요원으로 밝혀지면서 당시 미국의 개입 정황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각주:5] 이런 점들은 미국이 군정軍政 이후 남한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우려 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따라서 미국의 외교정책 수행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CIA가 어떤 조직인지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번 번역 연재를 준비하게 된 동기도 거기서 비롯됐다.

제임스 트레이시 박사는 이 글 ‘CIA와 미디어: 세계가 알아야 할 50가지 팩트’ 이후, 50가지를 더 추가해 모두 백 가지 사실을 정리했다. 이를 전편과 후편으로 나눈다면, 전편의 번역은 인터넷에 공개된 문서를 원문으로 사용했다. 후편은 인터넷에 게재했던 자료를 보강한 판본을 번역에 사용할 계획이다. 후편의 원문은 트레이시 박사가 직접 제공했다. 【옮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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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중앙정보국(CIA)은 미국 내와 국외언론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이들은 대중이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읽는 모든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과연 그런지 모르겠지만, CIA 언론담당관과 언론인들은 한결같이 둘 사이의 연관성은 별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물론 흔치는 않겠지만, 그들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는 이면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정보기관과 언론매체가 협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 활동은  개인, 현장, 사건과 쟁점 등과 같은 정보를 모으는 일이 기본적인 과업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인민(people)에 제공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강화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뉴스 조직과 개별 언론인이 정보기관의 자산으로 활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독일의 언론인 우도 울프코테[각주:6]의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최소한, 이러한 정보기관의 활동은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만큼이나 넓게 퍼져 있다. 


2000년과 2004년 선거부정 은폐와  2001년 9.11 사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시리아의 정세 불안, 그리고 ISIS의 탄생 등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최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손 꼽히는 사건이지만, 대중의 대다수가 사실상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건들이다.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가 유비쿼터스로 구현되는 세상에서 많은 이들은 투명한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내몰린다. 왜 이런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지 누군가는 질문해야 한다. 


이 외에도, 1960년대의 정치적 암살이나 CIA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제 마약 밀매 등과 같이 가려진 사건(deep events)[각주:7]에도 수시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들 누구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비참한 역사를 빚은 이들 사건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해 대중적이고 현학적인 해설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지적한다. 뉴스룸 사회학을 포함해 광고 압박, 독점적인 소유권 구조, 공식적인 출처에 대한 뉴스조직의 과도한 의존, 단지 경력을 개발하기 위한 언론인들의 소박한 탐색활동 등 때문에 대부분의 주류 언론이 그 부분에서 실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들 가운데 ‘전문적인 선전책동’ 역시 하나의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드러나지 않는(silence) 광범위한 음모론은 그리 드물지 않게 확인되는 또 다른 ‘기만의 영역’을 암시한다. 특히, CIA 등 정보기관은 인민의 사고와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뉴스매체에 개입한다. 그들이 개입하는 방식이란 일반에 알려진 것을 근거로 겨우 추정할 만한 것이다. 


아래에 열거하는 것들은 역사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이며, 매우 철저한 팩트들이다. 이들 팩트는 실체적인 정보기관 등이 가진 권력이 모호한 영역에 걸쳐 있는 기억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기억은 대중적이면서 권위를 가진 역사적 기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세계가 알아야 할 50가지 팩트

첫 번째, CIA의 작전명 ‘모킹버드’(MOKINGBIRD)는 오랫동안 미국의 주요 뉴스매체에 대한 CIA의 남다른 관심이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키스톤(keystone)으로 간주되었다. 모킹버드는 CIA의 전신인 OSS(Office for Statiegic Service, 1942~1947)에서 비롯됐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주로 유럽 전구(戰區)에서 활동하는 언론인들과 심리전 전문가들의 네트워크로 설립됐다. 


두 번째, OSS의 원조로 조직된 많은 관계(relationships)들은 OPC(정책조정국, Office of Policy Coordination)라고 일컫는 국무부 운영조직(State Department-run organization)을 통해 전후 시대에도 이어졌다. 당시 이를 감독했던 이는 OSS의 직원이었던 프랭크 위즈너(Frank Wisner)다.[각주:8]


세 번째, 역사가 리자 피즈(Lisa Pease)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에 OPC의 요원은 302명에 불과했지만, 1952년에는 2,812명으로 늘었다. 뿐만 아니라, 3,142 명의 해외 계약 인력(overseas contract personnel)까지 확보하는 정도로 성장했다. 이 기간 동안 예산은 470만 달러에서 8,200만 달러로 늘었다. 리자 피즈에 따르면 OPC는 “CIA 초창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 조직(unit)”이었다. (Lisa Pease, “The Media and the Assassination,” in James DiEugenio and Lisa Pease, The Assassinations: Probe Magazine on JFK, MLK, RFK and Malcolm X, Port Townsend, WA, 2003, 300.)


네 번째, 많은 직업적인 CIA 요원들처럼, 전 CIA국장(DCI: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 중앙정보국장) 리차드 헬름즈(Richard Helms)[각주:9]도 언론인이다. 헬름즈는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 국제합동통신) 재직 당시 자신의 상사에 의해 요원으로 선발됐고, 당시 막 출범한 OSS의 프로그램 ‘검은 프로파간다’(black propaganda)에 합류했다. 헬름즈를 선발한 상사는 그에게 “자넨 타고났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Richard Helms, A Look Over My Shoulder: A Life in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New York: Random House, 2003, 30-31.)


다섯 번째, 위즈너는 마셜플랜(Marchal Plan, ERP: European Recovery Program)[각주:10] 지원금을 자기 부서의 공훈을 만들기 위해 사용했다. 위즈너의 지부는 그 돈을 ‘캔디’(candy)라고 불렀다. CIA 요원 길버트 그린웨이(Gilbert Greenway)는 “그 돈을 다 쓰는 건 불가능했다”라고 회상했다. “나는 위즈너와 함께 감사관과 만났던 기억이 있다. 세상에, 나는 우리가 그걸 어떻게 다 쓸 수 있느냐고 말했다. 거기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었고, 누구도 그돈을 계산할 수 없었다. 정말 놀라웠다.” (Frances Stonor Saunders, The Cultural Cold War: The CIA and the World of Arts and Letters, New York: The New Press, 2000, 105.)


여섯 번째, OPC가 1948년 CIA를 창설하기 위해 특수활동국(OSO: Office of Special Operations)과 통합되었을 때, OPC의 미디어 자산 역시 흡수되었다. 


일곱 번째, 위즈너는 ‘선전 자산 인벤토리’(Propaganda Assets Inventory)를 고수했다. 이들은 위즈너의 ‘롤러덱스’(rolodex)[각주:11]와도 같았다. 그들은 위즈너가 어떤 곡조를 선택하든 이를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800여 개의 뉴스매체와 정보원을 포함했다. 사실, 이 자산은 위즈너의 ‘월리처’(Wurlitzer)[각주:12]로 더 유명했다. 조직망은 자유유럽방송(Radio Free Europe)처럼 언론인과 칼럼니스트, 출판인, 편집자 등 모든 조직을 망라했고, 복합적인 뉴스 조직을 아우르는 ‘스트링어’(stringer)[각주:13]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Pease, “The Media and the Assassination,” 300.)


여덟 번째, 어느 CIA 분석가에 따르면, 위즈너의 작전이 가동되고 몇 년 후, 그는 뉴욕타임즈와 뉴스위크, CBS 등 공신력을 가진 언론인을 갖게 됐다. 여기에 스트링어 등 여타의 소통수단 등이 더 확보됐다. 그 수는 400에서 600명가량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각각은 개별적인 작전을 맡았다. 탐사 저널리스트 데보라 데비스(Deborah Davis)는 이렇게 말했다. “한 해 비용만 수만에서 수십만 달러가 소요되는 가운데, 코드네임, 현장의 감독관과 사무소 등이 요구되었다. 이 비용은 한 번도 정산(精算)된 적이 없었다.” (Deborah Davis, Katharine the Great: Katharine Graham and the Washington Post, Second Edition, Bethesda MD: National Press Inc, 1987, 139.)


아홉 번째, 언론과 같은 형태의 심리 작전은 대중여론(mass opinion)에 영향을 주거나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엘리트들에게도 쓸모가 있었다. CIA 요원이었던 마일즈 코프랜드(Miles Axe Copeland Jr)[각주:14]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의 대통령, 국무장관, 국회의원, 심지어 CIA 국장조차 CIA의 보고서를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슐츠버거(Cyrus Leo Sulzberger)[각주:15]나 아노 드 보그라(Arnaud de Borchgrav)[각주:16], 혹은 스튜어트 알솝(Stewart Alsop)[각주:17]이 작성한 같은 주제의 기사는 직접 찾아 읽었다. 그들은 그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깊은 감명을 받을지 모른다.”(『미디어와 암살』 301)


열 번째, 대럴 가우드(Darrell Garwood)는 CIA가 감시와 견제를 피하기 위한 공작도 펼쳤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 중후반까지, CIA는 학계나 선교단체, 영향력 있는 언론의 편집위원, 출판업자, 일반 대중의 태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떤 분야든 침투함으로써 은밀한 활동에 가해지는 비판을 막으려 했다. 이외에도 의회의 감시 혹은 잠재적인 사법적 영향을 우회하려 했다고 한다. (Darrell Garwood, Under Cover: Thirty-Five Years of CIA Deception, New York: Grove Press, 1985,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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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 Media: [1편] 총기난사 사건과 제임스 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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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hodri Jeffreys-Jones(1942년 1월 28일 생)은 미국의 역사학자다. 그는 CIA와 FBI 등을 연구했으며 미국 첩보(American intelligence) 역사 연구의 권위자이다. [본문으로]
  2. Dwight David Eisenhower(1890년 10월 14일 ~ 1969년 3월 28일)는 미국의 34번 째 대통령이다. 애칭으로 ‘아이크’(Ike)로 불리기도 했던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서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끌었다. 전후, 1951년에 첫 번째 나토 사령관이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1952년이다. 그의 공약 가운데 하나가 한국전쟁의 장기화를 막는 것이었고, 1953년에 휴전을 이끌어냈다. (참고: 위키백과) [본문으로]
  3. 1961년 4월, 미국은 쿠바 망명자들 1,400여 명을 훈련시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를 전복시키려 피그스 만 침공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960년부터 계획된 이 작전을 주도한 곳이 CIA였다.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는 직접적인 개입을 부정했지만, 주권침해라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참고: 위키백과) [본문으로]
  4. Harry S. Truman(1884년 5월 8일 ~ 1972년 12월 26일)은 미국의 33번 째 대통령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한국 전쟁은 트루먼 시절에 시작해 아이젠하워 취임 직후 휴전했다 [본문으로]
  5. 재미 사학자 방선주 교수가 2002년 1월 미 육군 군사연구소에서 문건을 입수했고, 이를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안두희는 CIC 요원이자 백의사(白衣社)의 비밀 암살단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문으로]
  6. Udo Ulfkotte(1960년 1월 20일~2017년 1월 13일)는 독일의 주류 언론매체 가운데 하나인 <프랑크푸르트 공중신문>(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이다. 그는 2014년에 『게카우프테 조날리스트』(Gekaufte Journalisten)라는 책을 내며 파장을 일으켰다. 책의 제목을 우리말로 풀면 ‘매수된 언론인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2017년 3월 15일에는 북미에 기반을 둔 출판사 타이엔 레인(Tayen Lane)에서 ‘Bought Journalists’라는 제목으로 영어 판본을 출간했다. 부제는 ‘용역 언론인들: CIA는 어떻게 뉴스를 사나’(Journalists for Hire: How the CIA Buys the News)이다. 이때 영어 번역을 제임스 트레이시가 맡았다. 책이 출판되고 타이엔 레인은 책 소개 페이지를 닫아버렸고, 아마존 역시 유통을 중단했다. 표면적으로는 허황된 음모론을 단속한다는 게 명분이었을 것이다. 울프코테 기자는 생의 많은 시간을 중동 일대에서 보냈다. 그는 1988년 이란에서 발생한 독가스 공격 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울프코테 기자는 서구 주류 언론매체 종사자들이 CIA 등 정보기관에 매수됐다고 폭로하며 자신이 바로 그들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 주류 언론인은 내 책에 대해 보도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해고될 것이다. 독일 언론인이 글을 쓰거나 얘기를 할 수 없어 (내 책은) 베스트셀러다.” 울프코테 기자는 결국 심장마비로 57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추후 더 자세하게 다루어볼 계획이다. [본문으로]
  7. 당초 deep events를 '심대한 사건'으로 해석했으나, 문맥상 deep state와 같이 은폐된 사건을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본문으로]
  8. OSS의 핵심부서인 OPC를 CIA가 승계했다는 점, 그리고 OSS 요원이 OPC의 감독관으로 임명된 점 등은 두 기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둘의 차이를 찾자면, CIA의 비밀공작이 정보기관 내에 전담기구를 두고 법적 승인하에 공식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미국의 비밀공작<부록>, 『현대국가정보학』, 전웅, ㈜박영사, 2015) [본문으로]
  9. Richard McGarrah Helms(1913년 3월 20일~ 2002년 10월 23일)는 1966년 7월부터 1973년 2월까지 미 중앙정보국장(DCI)을 지냈다. [본문으로]
  10. 유럽 부흥 계획이라고도 일컫는 이 사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유럽의 동맹국을 원조하기 위해 미국이 세운 계획이다. 마셜플랜은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의 성을 따 명명한 것이다. [본문으로]
  11. 회전하는 형태로 파일 또는 문서를 보관하는 도구다. 주로 사람들의 이름이나 주소가 기록된 문서나 명함 등을 여기에 꽂아 관리한다. [본문으로]
  12. 월리처는 흔히 루돌프 월리처 주식회사(Rudolph Wurlitzer Company)를 줄여서 일컫는 말이다. 루돌프 월리처는 독일계 미국이민자였다. 그는 1853년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서 독일의 악기를 수입해 판매했다. 1880년부터 피아노를 제작했고, 1896년에는 동전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노 등을 제작했다. 월리처사는 뉴욕, 엘미라의 호프존스 오르간 회사를 점진적으로 합병했고, 20세기 초에 '유니트오케스트라'로 알려진 파이프오르간을 개발해 인기를 끌었다. 이 악기는 금관 트럼펫과 튜바, 크라리넷, 오보에, 차임, 실로폰, 북 등 여러 악기의 음색을 낼 수 있었다. 이후 기술의 발달에 힘 입어 전자피아노와 전자오르간, 주크박스 등을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했다.(『기계신부-산업사회 인간의 민속설화』(The Mechanical Bride: Folklore of Industrial Man), 마셜 매클루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본문으로]
  13. 영한사전은 스트링어를 종통재(縱通材), 옆대, 현을 매는 사람, 생선을 매다는 끈 등으로 풀이한다. 영어사전(kr.dictionary.education)에 따르면 스트링어는 언론 분야의 직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풀이는 다음과 같다. “A freelance correspondent not on the regular newspaper staff, especially one retained on a part-time basis to report on events in a particular place.” [본문으로]
  14. Miles Axe Copeland Jr는 미국의 음악가이자 사업가, 그리고 CIA 요원이었다. [본문으로]
  15. Cy Sulzberger는 미국 언론인이자 논픽션 작가이다. 그는 뉴욕타임즈 소유주의 일원이었으며 1940년에서 1950년대까지 신문사의 수석 해외특파원이었다. [본문으로]
  16. Arnaud de Borchgrav는 벨기에계 미국인 언론인으로 국제 정치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다. <뉴스위크>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후, <워싱톤 타임즈>와 에서 주요 사설 및 간부 자리를 맡았다. [본문으로]
  17. Stewart Alsop은 신문 칼럼니스트이자 정치 분석가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