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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_ongoing/◎CIA와 미디어

CIA & Media: [4편] 세계가 알아야 할 50가지 팩트(21에서 30)


이번 편에서는 미국의 유수 언론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교협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각주:1]라는 씽크탱크가 거론된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언론의 성장에 정보기관의 역할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정황뿐만 아니라, CFR 구성의 배경이 민간 정보기관이었던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케네디 암살을 파헤치던 지방검사 짐 게리슨(Jim Garrison)의 공적인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에 주류 언론이 CIA 자산으로 활약했던 점은 결코 남의 나라 낯선 이야기만은 아니다. 옮긴 이

 

스물한 번째. 프랭크 위즈너와 알렌 덜레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이었던 필립 그레이엄의 친분은 두터웠다. CIA와 끈끈했던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뉴스매체로 성장했다. 이를 지켜봐 온 데이비스는 《워싱턴포스트》 경영자와 CIA의 사적인 친분에 대해 “《워싱턴포스트》가 전후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배경”이었다고 지적했다. 모킹버드 작전이 시작되면서 덜레스와 그레이엄의 비밀은 곧 회사의 비밀이 되었다. 그레이엄은 CIA에 헌신적이었고, 프랭크 위즈너는 《워싱턴포스트》가 워싱턴에서 지배적인 뉴스매체가 되도록 도왔다. 이를 위해 CIA는 《타임즈 헤럴드》와 WTOP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각주:2]을 인수하도록 지원했다. (Davis, Katharine the Great: Katharine Graham and the Washington Post, 172.)


스물두 번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각주:3] 행정부는 언론인이자 작가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각주:4]을 ‘인콰이어리’(Inquiry)[각주:5]의 책임자로 배치했다. 인콰이어리는 최초의 민간 정보기관으로, 극비리에 운영됐다. 이들은 평화협상에 대비해 윌슨 정부에 필요한 정보활동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월가의 투기꾼들과 석유회사를 위해 해외의 천연자원을 확인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역사가 세르반도 곤잘레스(Servando Gonzalez)[각주:6]에 따르면, 이 조직의 활동은 사실상 전형적인 CIA 활동과 다르지 않았다. 곤잘레스는 인콰이어리의 활동에 대해 “계획에서부터 지휘 감독, 수집, 처리, 생산과 분석 그리고 유포에 이르기까지 대략적인 CIA의 정보활동 주기와 부합”한다고 밝혔다. 인콰이어리의 멤버 대부분은 훗날 미국 외교협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의 일원이 되었다. 리프만은 《워싱턴포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될 예정이었다. (Servando Gonzalez, Psychological Warfare and the New World Order: The Secret War Against the American People, Oakland, CA: Spooks Books, 2010, 50.)


스물세 번째. 잘 알려진 미 시사주간지 《타임》지와 《뉴스위크》는 CIA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각주:7]에 따르면, CIA는 이 두 시사주간지의 전직 해외 특파원이나 스트링어와 맺은 서면 합의서를 파일로 보관했다. 칼 번스타인은 이런 말도 했다. “앨런 덜레스는 종종 자기 친구인 고(故) 헨리 루스(Henry Luce, 1898년 4월 3일~1967년 2월 28일)에게 청탁하곤 했다. 헨리 루이스는 《타임》지와 《라이프》 잡지의 설립자였다. 그는 CIA에 자기 직원 중 몇몇을 선뜻 제공하거나 언론 경험이 없는 CIA 첩보원에게 업무와 기자증을 제공하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Bernstein, “The CIA and the Media” )


스물네 번째. CIA 관계자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각주:8]는 자서전에서 번스타인의 『CIA와 미디어』(the CIA and the Media)를 상세하게 인용했다. 그는 워터게이트 명성을 가진 탐사 언론인조차 그리 충분하게 파헤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고 논평하면서도 “나는 이를 반박할 무엇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한 발 더 나아가 번스타인은 이 나라(美) 최고의 언론사 임원 중 몇몇이 CIA의 귀중한 자산이라고 규정했다. … 에이비시(ABC), 엔비시(NBC), 에이피(AP: the Associated Press), 유피아이(UPI), 로이터(Reuters), 허스트(Hearst Newspapers), 스크립스 하워드(Scripps-Howard), 뉴스위크(Newsweek magazine) 등 CIA에 협력한 그 조직의 목록은 진정 미디어 산업의 ‘후즈후’(Who’s Who)[각주:9]였다.”(E. Howard Hunt, American Spy: My Secret History in the CIA, Watergate, and Beyond, Hoboken NJ: John Wiley & Sons, 2007, 150.)


스물다섯 번째. 1964년이었다. 이 무렵, 언론인 데이비드 와이즈(David Wise)와 토마스 B. 로스(Thomas B. Ross)가 「보이지 않는 정부」(the Invisible Government)[각주:10]를 출간하면서 처음으로 CIA에 대한 폭로가 이루어지자 CIA는 모든 인쇄물을 사들이려고 했다. 대중이 이를 알지 못하게 해야 했지만 결국 다른 판단을 내렸다. 와이즈와 로스는 이 책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 막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그림자 정부는 1억9천만 미국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평화와 전쟁을 포함해 주요 결정이 공공의 시야에서 벗어나 이루어지고 있다. 알 만한 시민이라면 미국의 외교정책이 한쪽에서는 공적으로 작동하지만 바로 그 반대편에서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통해 비밀스럽게 작용한다고 의심할 것이다.”(Lisa Pease, “When the CIA’s Empire Struck Back,” Consortiumnews.com, February 6, 2014.)


스물여섯 번째. 뉴스 미디어에 침투한 CIA는 드러나지 않은 사건(deep events)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거나 이런 사건의 공식적인 해명을 지지했다. 예를 들어, 존 F. 케네디 암살에 관한 워런 위원회(Warren Commission)[각주:11]의 보고는 거의 모든 미 언론사들의 공감을 얻었다. 탐사전문 기자 프레드 쿡(Fred Cook)[각주:12]은 “나는 공식적인 보고서가 이처럼 대대적인 찬사와 함께 환영 받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면서 “1964년 9월 24일 워렌위원회 보고서가 공개됐을 때, 위원회의 결론은 모두의 동조를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주요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해 그 보고서를 분석하는 데 할애했다. 다음날 신문들은 특별 뉴스 분석이나 사설과 함께 조사 결과를 상세히 기술하는 장문의 칼럼을 게재했다. 평결은 만장일치였다. 모든 질문의 답이 그 보고서에 있었고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각주:13]는 어떠한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미국 대통령을 암살한 것이다.” (Fred J. Cook, Maverick: Fifty Years of Investigative Reporting, G.P. Putnam’s Sons, 1984, 276.)


워런 위원회 보고서의 표지워런 위원회 보고서 표지


스물일곱 번째. 1966년 말, 《뉴욕타임스》는 워런 위원회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숱한 의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작가 제리 폴리코프(Jerry Policoff)[각주:14]는 이를 지켜보았다. 그는 “그것은 결코 완료되지 않았다”라며 “앞으로도 《뉴욕타임스》는 워렌 위원회의 결과에 반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타임》의 휴스턴 지국 수석 기자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 기자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은 《타임》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수많은 미해결 의혹을 갖고 왔다. 하지만 이 의문에 해답이 될 만한 좋은 정보를 모아오면, 누군가는 그를 불러 또 다른 취재 건 등을 이유로 캘리포니아로 파견을 보냈다. 기자 어느 누구에게도 의문의 답을 찾는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건성이었던 셈이다. (Jerry Policoff, “The Media and the Murder of John Kennedy,” in Peter Dale Scott, Paul L. Hoch and Russell Stetler, eds., The Assassinations: Dallas and Beyond, New York: Vintage, 1976, 265.)


스물여덟 번째. 뉴올리언스 지방검사 짐 게리슨(Jim Garrison)은 리 하비 오스왈드가 1963년 11월 22일[각주:15]까지 달포 가까이 뉴올리언스에 있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1966년 케네디 암살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디유지니오(James DiEugenio)는 이 무렵 그가 “워싱턴과 뉴욕에서 온 허리케인 강풍을 맞았다”라고 설명한다. 당연히 첫 번째는 강풍은 CIA와 FBI 등 정부 기관이었고 간간히 백악관에서도 불어왔다. 뉴욕발 강풍은 《타임 라이프》(Time-Life)나 NBC 같은 주류 매체에서 비롯됐다. 게리슨은 마치 피뢰침 같았다, 거대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모든 조롱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아내는. 지방검사(DA: District Attorney)로서 논란이 불거진 덕분에 게리슨이 찾아낸 것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성공적으로 분산됐다. (DiEugenio, Preface, in William Davy, Let Justice Be Done: New Light on the Jim Garrison Investigation, Reston VA: Jordan Publishing, 1999.)


스물아홉 번째.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케네디 암살사건에 대한 게리슨의 독자적인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은 언론매체를 이용했다. 게리슨은 JFK 살인을 둘러싼 복잡한 세부사항을 진지하게 조사하기 위해 소환권을 가진 유일한 사법기관을 지휘했다. 게리슨의 주요 증인 중 하나인 고든 노블(Gordon Novel)은 게리슨이 대배심원을 조직하기 전 증언을 회피하기 위해 뉴올리언스에서 도망쳤다. 디유지니오에 따르면, CIA 국장 알랜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덜레스와 CIA는 뉴올리언즈에서 도망친 자와 십여 명의 친 CIA 언론인을 연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게리슨의 명성을 파괴하기 위해 뻔뻔한 시도를 할 텐데, 지방 검사에 관해 상상할 만한 아주 터무니없는 기사를 써낼 것이다.”(James DiEugenio, Destiny Betrayed: JFK, Cuba, and The Garrison Case, Second Edition, New York: SkyHorse Publishing, 2012, 235.)


서른 번째. CIA 관계자 빅터 마르체띠(Victor Marchetti)[각주:16]는 1967년 당시 CIA 국장 리차드 헬름스(Richard Helms)[각주:17]의 보좌관으로 참모회의에 참석하면서 저술가 윌리엄 데이비(William Davy)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헬름스는 참모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고 있는지’ 물으며 전 OSS 장교이자 CIA 요원이었고, 게리슨 조사의 1차 용의자인 클레이 쇼(Clay Shaw)가 곤경에 처한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William Davy, Let Justice Be Done: New Light on the Jim Garrison Investigation, Reston VA: Jordan Publishing, 1999.)



  1. 미국 외교협회, 약칭 CFR은 국제관계 및 미국외교정책에 대한 미 국민의 이해 증진 도모를 위해 1921년 설립된 비영리・초당파적 연구기관이다(외교부). 미국에선 브루킹스 연구소,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와 함께 가장 오래된 연구소로 손꼽히며 창설 이래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를 발간하고 있다. CFR은 미 정부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미 행정부의 주요관료를 다수 배출한 기관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WTOP는 여러 플랫폼에 걸쳐 워싱턴 D.C. 지역에 최신의 지역 뉴스, 교통 및 날씨 정보를 전달한다. 1926년 9월에 첫 방송을 시작했으며, WTOP라는 콜사인으로 바뀐 것은 1943년이었다. 이 콜사인은 ‘티펜 오하이오 경찰’(TOP)에서 따온 것으로, 오하이오주 티펜의 한 경찰 라디오 방송국에서 비롯됐다. WTOP는 1996년 3월에 종합뉴스 채널(all-news format)로 성장했다. [본문으로]
  3.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1924년 2월 3일)은 미국의 28대 대통령 (1913년 ~ 1921년)이다. 재임 중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이 있었고,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었다. 윌슨의 재임 중 연방준비제도(聯邦準備制度, Federal Reserve System)를 가장 중요한 입법으로 꼽힌다. [본문으로]
  4.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년 9월 23일~1974년 12월 14일)은 미국의 작가, 기자, 정치 평론가이다. 리프먼은 1913년에 잡지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을 창간했으며 ‘고정관념’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해 냉전의 개념을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잘 알려진 저서로는 『여론』(Public Opinion, 1922sus)이 있다. [본문으로]
  5. 인콰이어리는 우드로 윌신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협상을 위한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1917년에 설립한 연구단체다. 150여 명의 학자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대통령의 고문 에드워드 하우스(Edward House)가 지휘하고 철학자로 알려진 시드니 메제스(Sidney Mezes)가 직접 지도했다. 연구 책임자는 월터 리프만과 그의 후임 이사야 보우만(Isaiah Bowman)이었다. 이 그룹은 처음에는 뉴욕 공립 도서관에서 직무를 수행하다 훗날, 보우만이 합류하면서 뉴욕 미국 지리학 협회의 사무실로 옮겼다. 구성원 중에는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 외교 교육 등과 관련한 전문가가 포함돼 있었다. [본문으로]
  6. 세르반도 곤살레스(Servando Gonzalez)는 쿠바 태생의 미국 작가다. 그는 아바나 대학(University of Havana)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쿠바와 중남미 역사, 첩보와 첩보, 기호학, 하이퍼텍스트, 미술사에 관한 책과 에세이, 기사 등의 저술과 멀티미디어를 제작했다. (참고: intelinet.org) [본문으로]
  7. 칼 번스틴(Carl Bernstein, 1944년 2월 14일 ~ )은 미국의 언론인이다. 밥 우드워드 기자와 함께 워터게이트 사건을 밝히고,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의 사임을 일으킨 워싱턴 포스트 기자이다. 1973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
  8. 하워드 헌트(Everette Howard Hunt Jr., 1918년 10월 9일~2007년 1월 23일)는 CIA 요원(1949년부터 1970년까지)이자 닉슨 행정부의 ‘배관공’(plumbers) 즉, (비밀의) 누수를 담당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일명 배관공들은 외부에 유출되는 국가안보 정보의 정부 자료를 식별하는 역할을 했다. 헌트는 같은 팀이었던 고든 리디(G. Gordon Liddy) 등과 닉슨 정부를 위해 워터게이트의 발단이 된 미 민주당사 강도(도청) 사건 등 비밀 작전을 모의했다. 이 일로 헌터는 3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본문으로]
  9. ‘후즈 후’는 국가, 산업, 직업 등의 다양한 분야의 명성을 가진 사람에 대해 짧은 전기적 기재사항이 수록된 문헌이다. 후즈 후라는 얘기는 그 분야의 내로라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0. 1964년에 랜덤 하우스(Random House)는 데이비드 와이즈와 토마스 로스가 공동 저술한 『보이지 않는 정부』를 출판했다. 이 책은 외교에 관여하는 CIA의 공작을 폭로했다. 예를 들어, CIA의 쿠데타 작전인 과테말라 ‘피비석세스’(PBSuccess)와 이란 ‘에이잭스’(Ajax), 피그만 작전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이 책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을 타도하려는 CIA의 시도와 라오스와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밀 작전도 폭로했다. CIA는 『보이지 않는 정부』의 인쇄물 전체를 사들이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랜덤 하우스가 그렇게 하면 2판을 인쇄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이 아이디어는 기각됐다. (amazon.com) [본문으로]
  11.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한 대통령 직속위원회. 위원회는 1964년 9월 27일에 888쪽 조사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케네디 암살이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며, 그를 살해한 잭 루비(Jack Rdby) 역시 배후가 없는 단독 범행라고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위원장이었던 얼 워런(Earl Warren, 1891년 3월 19일~1974년 7월 9일)의 이름을 따 워런 위원회로 일컫기도 했다. 워런은 대법원 판사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다. [본문으로]
  12. 프레드 제임스 쿡(Fred James Cook, 1911년 3월 8일~2003년 4월 4일)은 미국의 탐사 저널리스트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에 걸쳐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4년 그가 쓴 『FBI 누구도 몰랐다』는 미 작가 렉스 스타우트(Rex Stout)의 소설 『네로 울프』(Nero Wolfe)와 『초인종』의 줄거리가 되기도 했다. [본문으로]
  13.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1963년 11월 24일 체포된 후 다른 교도소로 호송되다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Jack Leon Rub)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잭 루비도 교도소에서 사망하면서 대통령 암살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본문으로]
  14. 현(現암) 살 기록 보관소 및 연구 센터(Assassination Archives and Research Center) 전무이사. 약칭 AARC는 정치적 암살에 관한 정보를 입수, 보존, 배포하는 세계 최대의 민간 기록물이다. 여기에는 스캔한 문서를 포함해 35,000페이지 분량이 소장돼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다. 소장 자료는 오랜 기간 발행된 보고서와 새로 기밀이 해제된 녹취록과 문서 등이 섞여 있다. 이외에도 1970년대 정보기관의 학대를 연구한 교회위원회와 록펠러 위원회의 보고를 비롯해 FBI와 CIA 등 연방기관의 자료도 있다. [본문으로]
  15. 이날 12시 30분경 텍사스(Texas) 주 댈러스(Dallas) 시내에서 퍼레이드를 하던 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이 암살됐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는 텍사주 동편에 경계를 맞댄 루이지애나(Louisiana) 주에 위치한 시이며, 댈러스와는 약 715km 떨어져 있다. [본문으로]
  16. 빅터 레오 마르체티 주니어(Victor Leo Marchetti, Jr., 1929년 12월 23일~2018년 10월 19일)는 중앙정보국 부국장의 특별 보좌관으로, 이후 미국 정보 당국과 이스라엘 로비와 관련해 저명한 비평가가 되었다. 마르체티와 미 국무부 관계자였던 존 마크(John D. Marks, 1943년 출생)가 집필한 『CIA와 정보 컬트』(The CIA and the Cult of Intelligence, 1974년)은 CIA가 공공 정책 입안자들에게 조언하기 위한 정보활동이 어떻게 변질돼 왔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러나 미 연방정부는 검열을 위해 이 책을 법정에 보냈고, CIA는 저자들에게 이 책에서 339개의 지문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저자들은 저항했고 결국, 168개의 지문을 삭제했다. 발행인 알프레드 노프(Alfred A. Knopf)는 삭제한 지문을 빈칸으로 남겼고, 당초 CIA가 삭제하라고 했던 항목은 굵은 글씨로 강조해 책을 펴냈다. [본문으로]
  17. 리차드 헬름스(Richard McGarrah Helms, 1913년 3월 30일~2002년 10월 23일)는 존슨 전 미 대통령이 CIA 국장으로 임명하고 닉슨에 의해 연임됐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무마하라는 닉슨의 명을 거절하고 1973년에 사임했다. 헬름스는 CIA가 인간을 마인드컨트롤하기 위해 추진했던 엠케이울트라 프로젝트(Project MKUltra)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